[1994년 02월 20일 청주스테이크 노변의 밤 권영준 형제 말씀★]

1994년 2월 20일 청주스테이크 노변의 밤
권영준 형제 말씀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울 서 스테이크 낙성대 와드에 소속해 있는 권영준 형제라고 합니다.  부족한 저를 이렇게 초대해 주시고 저희 가족들을 환영해 주신 청주 스테이크 회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방금 저희들이 ‘오 높은 영광 보좌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찬송가를 불렀는데, 찬송가를 부르면서 생각나는 경험이 하나 있어서 잠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까 저희 부모님께서 미국에 가셔 가지고 스테이크장님 댁에서 아주 좋은 하룻밤을 묵었다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미국에서의 생활 기간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오면서, 저희 친척들이 일본에 많이 살았기 때문에 일본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일요일이 되니까 교회를 가고 싶은데, 어떻게 어떻게 물어 가지고 일본의 어떤 와드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금식 간증일이어서 모두들 이제 일본말로 뭐라뭐라 간증을 하는데, 저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튼 ‘한국에서 하는 거하고 참 비슷하게 하는구나’ 그 정도만 눈치를 채고 있었는데, 저의 아버지가 갑자기 저희 가족보고 “우리 일본에서 한번 간증해보자” 이렇게 말씀하시기에, 저는 그만 너무 정신이 혼미해져 가지고 “아버지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럼 먼저 아버지가 시범을 보이겠다.” 하시면서 나가셔서 미국 선교사를 한 명 데려다 놓고는 영어로 말씀하시고 미국 선교사가 일본말로 통역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어머님께서 용감하게 다시 나가셔서 또 영어로 말씀을 하시고 미국 선교사가 그것을 일본말로 통역을 했습니다.  제 차례가 됐는데 저는 일본말은 물론이고 영어도 사실 잘 못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굉장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님께서 제 악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거 있지 않느냐, 네가 가진 것으로 간증을 해라” 그렇게 말씀하셨고, 어머니와 함께 제가 이 곡으로 간증을 드리겠다고 누가 이야기를 하고는 음악으로 간증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나중에 “음악은 만국 공통어기 때문에 이거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아프리카에 가더라도 간증을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후에 어떤 일본 성도가 막 저를 보며 뭐라뭐라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며 간증을 하는데, 저는 하여튼 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거는 눈치를 챌 수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습니다.  근데 그 중에 한 일본 성도가 영어를 아주 잘했는데 그 간증을 그 자리에서 영어로 번역을 해서 나중에 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보았을 때 자기가 이때까지 하느님에 대해서 느껴 본 적이 잘 없었는데, 오늘 한 한국 꼬마의 음악 간증을 듣고 진짜 높은 영광 보좌의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그런 간증이었습니다.  저는 비록 어렸지만 그런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저는 이런 모임을 사실 굉장히 많이 가졌는데, 왜 제가 이 자리에 있을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단순히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했기 때문에 가진 사회적 모임들이 많이 있었고, 그런 모임에서 저는 수석 합격자의 지위로써 말씀을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노변의 밤 모임을 가질 때마다 저는 아주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저는 결코 사법 시험 수석 합격자로서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고, 또 그 의로운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고 또 열심히 노력한 아주 수많은 후기성도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그 노력의 과정들을 조금 간증드리고 싶은데, 그러한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제 개인적인 경험들을 많이 이야기하게 되겠는데,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를 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특히 전제를 하고 싶은 것은, 오해를 하기가 쉬운데 사회적인 성공은 결코 그 사람이 가진 신앙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고, 또 그러한 사회적 성공 자체만으로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승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하고 말씀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제가 청소년 시기에 가졌던 한 큰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세미나리 시간에 배웠던 모세라든지 앨마라든지 암몬이라든지 하는 그런 위대한 사람들에겐 아주 위대한 기적이 일어났는데, 왜 오늘날에는 그러한 기적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리고 제 자신에게는 왜 그러한 개인적인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던 중에 저는 한 좋은 성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몰몬서 9장에 있는 한 구절이었는데 15절에서 이렇게 모로나이는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제 너희, 곧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는 신을 스스로 생각한 너희 모든 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묻고자 하노니 내가 말한 이 모든 일이 일어났느냐? 이미 끝이 왔느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그리고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말씀을 하시면서 19절부터 21절까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때 만일 기적이 이루어졌다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기적의 하나님이시기를 그치시고도 오히려 불변하시는 존재이시겠느냐? 그러나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는 변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만일 그러하신다면 그는 하나님이시기를 그치실 것이라.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시며, 지금도 기적의 하나님이시니라. 또 그가 사람의 자녀들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기를 그치시는 까닭은 그들이 믿지 않음에 빠지며, 바른 길에서 떠나 그들이 의뢰해야 할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인한 것이라. 볼지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저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저에게 주시리니, 이 약속은 참으로 땅 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니라.  저는 이 성구를 읽게 되면서 제가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제 마음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아무런 기적도 저에게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기적을 왜 베풀어 주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던 한 청소년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극적으로 기적을 베푸시고 또 응답을 하시는 지에 대해서 저는 지금부터 간증을 하고자 합니다.  저에게 베풀어진 첫 번째 기적은, 훌륭하고 의로우신 부모님 아래에서 출생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에 대해서 물론 말씀드릴 것이 참 많지만 한 이야기로 이 모든 것을 압축하고자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벌써 훨씬 지났지만 저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한 가지 추억을 생각하곤 합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타 할아버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이미 깨치게 됩니다.  하지만 저희 3형제는 그것을 중학생이 될 때까지 깨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진짜 산타 할아버지가 우리집으로 왔습니다. 키도 아주 크고 또 외국에서 오셔서 그런지 말도 역시 서투시고 그래서 저는 ‘진짜 산타 할아버지인가 보다’라고 생각을 했고, 또 더욱 더 놀란 것은 제가 아버지께 갖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선물들이 다 그 보따리 안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아 역시 산타 할아버지는 참 대단하시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3학년이 되었을 땐 2학년 때보다 선물이 조금 더 줄었습니다.  ‘한 해 동안 착한 일 참 많이 했는데 왜 그러셨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는데 마침 엽서 하나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역시 외국에서 오셔서 그런지 글씨가 엉망이었는데 ‘올해는 좀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해서 선물을 많이 준비 못했다. 미안하다.’라고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저희 아버지께서 왼손으로 쓰신 엽서였습니다.  하여튼 이런 식으로 저희들은 완벽하게 속아 왔고,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친구들의 강력한 비난을 받으면서 사실을 깨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연극을 하셨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저는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 굉장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실제로는 그 구석을 저희 부모님께서 사랑으로 채워 주셨기 때문에 저는 결코 허전하지 않았고, 산타 할아버지라는 허상 대신에 저희 부모님의 사랑이라는 그러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저희 마음에 채울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다 보니, 보통 후기성도 2세들이 흔히 겪는 어려움이, 부모님의 신앙의 우산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간증과 신앙을 가지지 못하는 것인데, 저도 그와 유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라났습니다.  그저 안 가면 눈치 보이니까 부모님 따라서 교회를 가고, 또 초등회에서 말 잘 들으면 과자를 주니까 그냥 말 잘 듣고, 이렇게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 보니까 제 자신의 간증과 신앙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따라간 청소년 대회에서 당시 신학연구원 교수님이셨던 저희 이모부(도길회 서울 서 선교부장)께서 청소년들에게 세미나를 하시면서 마지막에 “이 중에서 저하고 중등부 세미나리에 참석을 할 수 있다고 약속할 수 있는 청소년들은 전부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이렇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저는 사실 세미나리에 가기 싫었지만 주위 청소년들이 전부 손을 들고 있었고 또 이모부가 저를 보고 계셔서 그래서 할 수 없이 손을 들게 되었습니다.  손을 들면서 이모부하고 약속을 한 것인데 세미나리에 한번 가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진짜 마음을 가지고 세미나리와 활동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가 보니까 아주 훌륭하게 준비된 교사님께서 훌륭한 공과를 해 주시고, 또 재미있는 활동이 마련되어 있어서 ‘야, 교회는 참으로 좋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제는 또 순진한 마음에 이 교회를 많이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친구들에게 “우리 교회 좀 가자.”라고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제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주로 장로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이었는데, 제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라고 그러니까 ‘뭐 많이 들어 본 교회 같아.’라고 그러면서 “잠깐만” 하며 수첩을 딱 꺼내면서 “아 그래, 여기서 봤었지.” 하면서 이야기를 꺼내는데 바로 그 교회에서 발행한 수첩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데 ‘다음 4 교회 중에 3대 이단이 아닌 것을 골라라’ 이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묻길래 저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아휴, 그것도 모르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이단이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그게 가장 확실한 답이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비난을 받으며 그만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내가 이때까지 하늘처럼 믿고 다니는 교회가 사회 나오니까 이 정도 대우밖에 못 받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부모님의 신앙의 우산에서 벗어나서 내 스스로의 신앙과 간증을 가지지 않으면 차라리 이 교회를 떠나 버리는 게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교회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세미나리에 좀 더 열심히 참여하고 교회 서적을 열심히 읽기 시작하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나 친구들과 많은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제가 고등학교에 올라가니까 그래도 어린 마음에 ‘우리 교회가 최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저는 지금부터 우리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한번 생활을 해보겠다라는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도 친구들한테 받은 핍박이 억울해 가지고 ‘왜, 억울하면 성공해 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가 결코 그런 사이비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좀 알려 봐야 되겠다는 생각에 ‘제가 수석 합격을 해서, 대학 입시 수석합격을 해서 기자들한테 막 우리 교회 선전을 하면 신문에서 그것을 보도해 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순박한 생각을 가지고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어버이날에 부모님께 편지를 드리기를 ‘제가 수석 합격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으니까 잘 지켜 봐 주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는데, 교회 세미나리 참석하고 활동 참석하고 안식일 지키고 그러면 공부할 시간이 남보다 적기 때문에, ‘어휴, 이래 가지고 어떻게 수석합격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두 가지 작전을 세웠습니다.  하나는 똑 같은 시간을 하더라도 남보다 많이 할 수 있도록 공부를 효율적으로 하자는 것과, 두 번째로 제가 아무리 효율적으로 해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계를 가지고, 결국은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 즉 신앙으로 하늘의 힘을 끌어내리는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자 라는 그런 두 가지 작전을 세웠습니다.

우선 첫 번째 작전을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공부에 대해서의 저의 관점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교리와 성약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가 얻은 예지가 전부 부활을 하고, 또 예지를 많이 닦는 사람이 그 다음 세상에서 그만큼 유익을 얻는다’라고 배웠는데,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예지를 닦을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다’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공부는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예지를 닦는 한 방편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에도 어떤 의미에선 도움이 되고, 또 하나님의 계명이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다는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하늘의 힘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좋은 신앙을 가져야 되는데’라고 생각을 하면서 두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안식일을 고3 끝날 때까지 다 지키자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선교사 기금을 내 힘으로 지금부터 한번 모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세미나리에 열심히 참여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세미나리에 참여하면서 저는 실제로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또 그 당시 장미경 자매님이란 분이 저희 교사님이셨는데, 아주 훌륭하게 준비한 공과로 저희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저는 얼마전에 몬슨 회장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일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몬슨 회장님이 길을 가는데 어떤 아이 세 명이서 막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첫 번째 아이가 탁 일어나면서, ‘야,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회사 사장이야.’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아이가 질세라 다시 일어나면서, ‘야, 우리 아버지는 알아주는 의사다.’라고 자랑하면서 말했습니다.  세 번째 아이가 그냥 기죽어서 가만히 있으니까 처음 두 아이가 “야, 너희 아버지 뭐하냐?” 그러기에, 세 번째 아이는 “그냥 교사일 뿐이야.”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몬슨 부대관장님께서 그 얘기를 들으시면서 교사가 얼마나 훌륭한 부름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직업과 부름이 교사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장미경 자매님께서 훌륭한 교사로서 저를 변화시켜 주셨고, 저는 항상 거기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걸 어떻게 보답할까 생각을 하다가 마침 지난번에 부산에서 노변의 밤 모임이 있어서 말씀을 할 때 보니까 저희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세미나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 쑥스러웠지만 공개적으로 장미경 자매님께 ‘훌륭하게 저를 성장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조금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그래도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때까지는 어떻게 어떻게 버틸 수가 있었고 시간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까 점점 시간이 쫓기고 학교에서도 강요하는 것이 참 많아졌습니다.  그래도 역시 두 가지 목표를 관철해야 되겠다, 공부를 남보다 효율적으로 할 것과 남이 가지고 있지 않은 신앙을 가지고 하늘의 힘을 끌어내릴 것, 이 두 가지 목표를 가졌습니다.  첫 번째 목표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하려고 수행했는지 잠시 몇 가지 예만 들어 드리겠습니다.  우선 군인들이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면, 뒤에 강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엄청난 동기 부여를 받아 가지고 막 싸우게 되는 것처럼, 저도 스스로 뒤에 강을 하나 설정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갈 때도 ‘내가 오늘 목표량을 다 달성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 생각을 하면 아무리 공부가 하기 싫어도 집에 가서 잠을 자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었고, 또 혹시 버스가 끊길지도 모르니까 택시비를 가지고 다녔던 적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 좀 이상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공부가 너무 안 되고 또 화가 나고 그럴 때는 그럼 내가 이 한 페이지를 다 읽을 때까지 숨을 안 쉬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냥 숨을 안 쉬고 읽다 보면 평소 같으면 10분 동안 읽을 것을 숨이 막히니까 30초 만에 엄청난 추진력으로 읽어 버린 적도 있었고, 또 암만해도 남들한테 이야기를 해 놓으면 자기 혼자 결심한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제일 무서우니까 선생님한테 가서 “다음 모의고사 몇 점 맞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그 모의고사 몇 점 못 맞으면 못 맞은 점수만큼 저를 때려 주십시오” 이렇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실제로 6점이 덜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6대를 맞을 생각을 하니까 너무 눈 앞이 깜깜했지만,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되겠다는 생각에 일단 제 결심을 선생님한테 보이기 위해서 머리를 완전히 머리카락 하나도 없이 빡빡 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선생님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아마 추석 전 날로 기억이 되는데, “선생님, 제가 6점 덜 맞았으니까 내일 선생님한테 맞으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선생님이 너무 측은하게 여기셨는지 “아이 괜찮다. 그냥 맞은 걸로 하자.”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지나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과 저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건 둘 다 보신탕을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표 점수를 넘으면 선생님이 제게 보신탕을 사주시고, 또 못 넘으면 제가 선생님께 보신탕을 사 드리고 해서 실질적으로 보신탕을 열심히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운동을 열심히 안 하면 또 몸이 허해져 가지고 공부를 못할 것 같아서 운동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우리 학교 화장실 앞에 평행봉과 철봉이 있었는데, 규칙을 하나 세워 가지고 ‘화장실 들어가기 전에 평행봉과 철봉에서 내가 스스로 규정한 운동을 해야 된다’ 이런 규칙을 세웠습니다. 이제 아무리 볼 일이 급해도 제가 세워 놓은 규칙이 있기 때문에 화장실 가는 횟수만큼 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신앙을 지킴으로써 하늘의 힘을 끌어내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했는데, 우선 저에게 아주 소중한 친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 친구들이 고3이 되면서 다 모여 가지고, ‘우리 올해 한국에서 가장 합당한 고3이 되어 보자’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프로그램을 수행했는데, 그것은 ‘일단 교회에 좀 일찍 나오자.  일찍 나와서 우리가 교사나 제사니까 성찬도 준비하고 성찬 축복할 수 있는 준비를 하자.’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모임을 마치고 나서 시간이 좀 뭐하니까 남아서, ‘우리 같이 일정한 프로그램을 수행하자’ 하면서 했던 것이 같이 경전 공부하고 영어 공부도 같이 하였습니다.  그래 가지고 미국 성도의 벗(엔사인)도 같이 번역을 하고 그 다음에는 개인 기도 시간, 같이 기도하는 시간, 토론하는 시간, 이런 시간들을 짜 가졌습니다.  그 다음에 중창 연습을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 제 목소리가 원래는 이렇지 않고, 제 코도 지금 이런 상태인데, 그렇게 된 이유는 어제 저희 친구들이 5년 만에 다시 모여 가지고 중창발표회를 대구에서 크게 가졌습니다.  저희들이 정말 가지고 있던 꿈과 소망이었는데 그 동안 친구들이 전부 합당하게 교회 안에서 남아서 어제 마침내 다시 모여 가지고 중창 발표회를 가졌는데,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했던지 그만 코가 이렇게 되 버리고 목도 다 쉬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이 너무 자랑스럽고 가슴 벅찬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한편 또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진로를 택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천사를 보내 주시든가 최소한 제 마음에 이야기를 해주시겠지’라고 생각을 하고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결코 응답을 주시지 않으셨고 저는 원서 쓰는 날까지도 결정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래 좋아했던 사회학과라든지 경제학과에 가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법대는 아예 제 관심 밖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법대에 가면 고시공부 해야 되고, 그럼 제가 여러 가지 취미 생활을 참 하고 싶었는데, 그런 것들을 다 포기해야 되기 때문에 법대는 가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서 쓰기 얼마 전에 축복문을 받게 되었는데 그날 마침 또, 그 당시 서머타임이 적용되던 때였고 그날이 서머타임이 끝나는 날이었습니다.  축복사님이 아침 6시 50분까지 오라 그랬는데 저는 서머타임이 끝난 줄도 모르고 새벽 5시 50분까지 그 집에 갔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버스가 안 오나 불평을 하면서 택시를 타고 그 집에 갔는데, 5시 50분에 초인종을 누르니까 축복사님께서 잠옷을 입고 부시시한 모습으로 “너 왜 벌써 왔냐?” 그렇게 말씀하시기에 저는 아주 뜨끔했는데, 들어가서 축복사님과 접견을 하면서 저는 내심 축복문을 통해서라도 진로에 관한 축복이 내려지기를 바랐습니다.

근데 마침 축복사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아! 너 고3이지, 진로를 한번 생각해 봐야 될 텐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면서, 우리 아버지가 사실 상대 교수님이신데 우리 아버질 공대 교수님으로 그때 착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말씀하시길 “아버지도 공대 교수고 그러니까 너도 공대 쪽이 맞지 않을까?”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문과생이고 이과생들만 갈 수 있는 공대와는 전혀 무관한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고 ‘어휴 마지막 기회가 그만 사라져 버리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축복문을 주시면서 제일 마지막 부분에 여러 줄에 걸쳐서 도무지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명확하게 제 진로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저는 제 귀를 의심했지만, 그래도 축복문이 그렇게 주어지는 것을 보고 ‘내가 그 동안 열심히 금식하고 기도해 온 것에 대한 응답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계속 좀 기분이 황당했습니다.  저는 법대 가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는데, ‘결국 1년 동안 금식하고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축복사님을 통해서 상식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결론을 주셨다.  축복사님은 나를 이과생으로 착각을 하고 계셨고, 또 나 자신이 법대를 가기를 원하고 있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법대를 가라고 명하셨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냥 다른 건 모르지만 하여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법대를 가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안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봅니다.

결국 대학입시를 치르고 나서 다행히 합격을 했지만, 제가 열심히 간구해 온 수석의 목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고등학교 생활을 끝내고 저희 아버지, 어머님으로부터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첫 아들이 떠나니깐 너무 섭섭하셔 가지고 가장의 축복을 하시면서 눈물도 흘리시고 그러셨는데, 떠나 가지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법대 특성상 지금 선교사업을 안 나가면 앞으로 선교사업 나갈 기회가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급히 선교사업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준비가 너무 안 된 상태에서 나갔기 때문에 선교사 훈련원에서 사실 고민도 많이 했었습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에 돌아가야겠다는 강한 유혹도 받았지만, 여러 가지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가 선교사업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선교 사업 나가서 사실 기쁜 것이 있다면 제가 선교사업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저의 십일조를 바칠 수 있었다는 것이지만, 슬픈 것이 있다면 제가 너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가서 충분한 만큼 남들에게 베풀지 못했다는 그런 것이 좀 슬픕니다.

선교사업을 통해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웠는데 그 당시 선교부장님이 신호범 부장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께 참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분께서 눈물이 참 많으셨는데, 선교사들을 이렇게 모아 놓고 나와서는, 선교부장님께서 “내가 태백 가 보니까 너무 춥더라.” 라고 이야기를 하시면서 태백 선교사들을 걱정하시고 그 자리에서 막 눈물을 흘리시는 그런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신 부장님을 보고 저는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었고, 또 선교사업을 통해서 비록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런 어려움을 겪고 나니까 나중에 고시 공부하면서 아무리 어려워도 선교사업 때 생각하면, ‘에이 뭐, 가가호호 하다가 개한테 물린 것보다 낫지’ 이런 생각이 들어서 고시 공부가 전혀 어렵게 느껴 지지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귀환을 했는데, 저는 대구에 갔다 서울로 다시 올라오는 길에서 기차 안에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 이번엔 대학 4년을 제일 열정적으로 아주 열심히 한번 보내보자.’ 이런 생각을 하고 올라갔습니다.  각오를 하고 갔는데 실제 생활은 제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딴판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교회에서 제가 조금 벅차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부름 들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뻐 가지고 부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제가 음악을 하다 보니까 온갖 경조사, 결혼식, 침례식, 거기다 바이올린 좀 해 달라고 부탁이 들어와서 그걸 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그걸 안 해주면 제가 욕을 듣는 그런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것도 있고 부름도 많았고, 그래서 나중에는 너무 지치고 굉장히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고3 때는 그냥 저희들이 교회에 있으면 교회 어른들이 와 가지고 “어휴 고3인데 제발 집에 가서 공부 좀 해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저희는 “싫어요, 교회 있을래요.” 이런 상황이었는데 대학생이 되니까 막 교회에선 “권 형제, 이리와 봐요, 요 부름, 저 부름, 다 권 형제님이 할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저는 반대로 속으로 ‘아! 이러다가 난 고시 공부 전혀 못 하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대학생이 되다 보니까 ‘아!, 사회에 잘못된 점도 많구나.’ 그런 생각도 자꾸 들게 되고 괜히 자꾸 비판적인 시각으로 교회와 사회를 바라보게 되고 그러한 가운데 갈등을 참 많이 겪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신학 연구원 교수님께서 저를 잘 붙들어 주셨고, 그 다음에 저희 주위에 감독님이라든지 가족이라든지 하는 분들께서 많이 도와 주셨고, 또 결정적으로 축복문의 문구를 생각하면 저는 결코 포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사 드리는 것은 감독님께서 제 어려움을 아시고 제 사정을 소상히 들으시고는 “그래, 그러면 토요일 날 네가 공부할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일요일 날 할 수 있는 부름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감독님께서 저의 사정을 배려해 주시기 않으셨다면 과연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앞으로 지도자가 되면 그냥 강요하는 지도자가 되기 보다는 정말 회원 개개인의 사정을 잘 들어 보고 결정을 하는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시 공부를 시작 했는데, 우선 고시공부가 내 출세와 개인의 영달을 위한 공부가 되면 결코 하늘의 힘을 끌어내릴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1992년 1월 14일에 성전에 가서 제 수험 기간을 하나님께 헌납을 드렸습니다.  해의 왕국실에서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이 기간이 결코 제 출세를 위한 준비 기간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또 이 기간을 통해서 제가 나중에 이 교회를 위해서 무언가 봉사할 수 있도록 당신께 헌납을 드리니까 저를 잘 보살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다시 미국에 계신 아버지 어머님께 수석합격을 해보겠다는 편지를 드리고 그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가지 생각나는 게 92년 설날 연휴 때 일입니다.  그때 저는 고향에 내려가 봤자 부모님도 안 계시고 그래서 서울에 남아 있었는데, 또 제가 살고 있었던 곳은 팔을 뻗으면 벽이 닫는 아주 좁은 고시원 방이었고 그냥 식당들은 다 문 닫아 버리고 저는 밥 먹을 데가 없고, 그러니까 도서관도 문 닫아 가지고 연휴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을 하다가, 교회에서, 어차피 그때는 아무도 없을 때니까 공부를 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고 비상 식량으로 참치 캔이나 김 같은 걸 사고 쌀도 사고, 그래서 교회 조리기구를 사용해 가지고 한 3일 동안 교회에서 밥을 해먹고 거기서 공부를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히터 틀기는 참 미안해 가지고 얼마나 추운지 덜덜덜 턱을 막 떨면서 공부를 하다가, 또 배고프면 밥을 해 먹고 그랬는데, 제가 사 놓았던 반찬이 짜장 참치 캔이었는데, 제가 그만 캔 따개를 잊고 안 가져 왔습니다.  해서 슈퍼마켓은 전부 문을 닫고 이걸 먹기는 먹어야겠는데 평소 같으면 ‘그냥 안 먹고 말지’ 그랬는데, 배 고프니까 그냥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저걸 먹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떡할까 하다가 막 젓가락 포크로 암만 찔러도 그게 견고하게 만들어져 가지고 안 되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망치를 가지고 그냥 그걸 깨 가지고 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는데 선교사 한 명이 와서 저를 불러냈습니다.  저 보고 열심히 공부한다고 그러면서 이야기하기를, 잠시 못하는 영어를 쓰겠습니다.  원어를 그대로 옮기면, ‘Faith and Hard work never fail’ 라고 이야기를 하시면서, ‘신앙과 아주 열성적인 노력이 병행하면 무엇이라도 실패하지 않는다’는 그런 말씀을 주시곤 가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얼마나 귀중했던지 고시 공부하면서 계속 ‘신앙과 열성적인 노력이 병행되면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계속 제 자신에게 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또 이제 밤이 되어 너무 공부가 안 되면 벤치에 누워 별을 바라보았던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스스로에게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다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까 할 수 있다’라는 답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내 몫을 다하고 있는가?’라고 질문을 해보았고, 만약 내 몫을 다하였다고 생각이 들면은 뿌듯한 마음으로 도서관으로 들어갔고,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면 ‘반드시 내가 내 몫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도서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자리를 지키기가 너무 어려울 때, 저는 아주 위대한 선교사라고 저희 대구 스테이크에서 많이 존경하셨던 이종환 형제님께서 저에게 주셨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그 분께서 저를 고3 때 불러 이야기 하시기를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나폴레옹하고 유럽 연합군하고 막 싸울 때, 연합군측 장군이 웰링턴 장군이었는데 웰링턴 장군한테 참모가 보고를 했습니다.  “장군님.” 그러면서 “지금 우리 연합군이 너무 밀리고 있습니다.  빨리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장군이 잠시 생각하다가 내린 명령이 뭐였냐 하면, “이길 생각을 하지 말고, 다만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10분만 더 비티라.” 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저에게 “때로는 잘 하려고 생각하지도 말고 바로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버티라” 라는 그러한 조언을 주셨습니다.

너무 공부하기 싫어서 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을 때 저는 항상 그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하기 싫을 때 그 자리에서 ‘10분만 더 비티자’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물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학교에 가면 공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교회에 가면 또 신앙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저희 가족들이 참 많은 편지와 전화를 해 주셨고, 저는 그러한 점에 대해서 저희 부모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드디어 고시를 치게 되었고 4일 동안 치게 되었습니다.  잠도 잘 못자고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 시간에 저는 열심히 축복문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하면 된다. 열심히 하면 된다.’ 그러면서 막 답안지를 열심히 땀을 흘리면서 썼습니다.  똑 같은 시간에 저희 부모님께서는 여관을 같이 잡으셔 가지고 계셨는데, 아들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시면서 시험 기간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같은 기간 동안에 저희 외할머니께서는 88세이신데도 손자를 위해서 철야 기도를 하고 계셨고, 또 역시 아마 같은 시간에 많은 교회 회원들이 제가 지금 이 시간에 시험을 잘 칠 수 있도록 기도를 드렸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소속해 있던 낙성대 와드와 봉천 와드의 상호 부조회 자매님들도 그 시험 기간 동안 저를 위해서 특별 성전 방문을 하셔 가지고, 열심히 기도를 하신 그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또 역시 같은 시간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비로운 손길로 저의 답안지에 임재 하셨다고 저는 지금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기적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부족한 제 능력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특별히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저의 첫 번째 수석 합격의 소망을 들어 주시지 않고, 두 번째 소망을 들어 주신 데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열심히 교회 선전을 했지만 대부분의 기자들이 그만 다 빼 버렸습니다.  저희 교회 이름을 다 빼 버렸는데, 고시 공부하기 전에 선교사업을 했다는 게 너무 이상해서 였는지 몇몇 신문에서는 저희 교회 이름을 그대로 실어 주었습니다.

 

권영준 형제의 뒷말 –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