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제프리 알 홀런드, CES모임, BYU, 2000년 2월 15일★]

제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How Do I Love Thee?"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
   
십이사도 정원회

  (“제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제프리 알 홀런드, 브리검 영 대학교 1999~2000년 말씀, 158~162)

 저는 오늘 아침에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 그리고 여러분의 우정과 데이트, 진지한 구애, 궁극적으로는 여러분의 결혼 생활에 의미가 있는, 또한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갓 약혼한 젊은 여성이 지난 달에 제게 “밖에 나가면 그런 충고가 널려 있어요!”라고 말할 정도로 흔한 주제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로맨스에 관해 불필요한 수사를 덧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교회에서의 여러분의 회원됨에 버금가는 “결혼 생활에서의 관계”가 현세와 영원에서 갖게 될 가장 중요한 관계이며, 충실한 이들에게는 현세에서 오지 않았던 것이 영원에서는 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따라서 제가 몇 말씀을 더 드리더라도 여러분 모두가 저를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경전에 있는 조언 내지는 복음의 권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원하기만 하면, 그것은 인생의 기본이 되듯이 사랑에도 기본이 되며, 그러한 권고는 남자와 여자에게 동등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의 조류나 시대의 유행 또는 술수와는 관계가 없지만 진리와 관련된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아침에 저는 여러분의 우정 관계와 데이트 그리고 더 나아가 여러분의 결혼을 경전과 관련해 생각해 보고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몰몬이 순수한 사랑을 주제로 길고도 놀라운 설교를 행한 후에, 이 높은 그리스도인다운 덕성을 모로나이서 7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이라고 좀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견딤이요, 누구든지 마지막 날에 이를 지닌 것으로 드러나는 자는 잘 될 것임이니라.

"그런즉 … 마음의 힘을 다해 아버지께 기도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따르는 자 모두에게 내려주신 이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며,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며, 그가 나타나실 때에 그가 계신 그대로 우리가 그를 볼 것인즉, 우리가 그와 같이 되게 하며, … 그가 순결하신 것같이 우리가 순결하게 되게 할지어다." [모로나이서 7:47~48]

참된 사랑,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사실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번,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계신 아들로 오셨을 때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몰몬이 얼마간의 지면을 할애하여 우리를 위해 묘사하고, 그리고 사도 바울 또한 신약 시대에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묘사했던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모든 면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참된 사랑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완전하게 실천하셨으며, 우리가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길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완전함에 이를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를 위한 신성한 표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루고 또 달성하려고 계속 노력해야 하는 목표이며, 분명히 우리가 계속 감사드려야 하는 목표입니다.

이것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몰몬이 분명히 가르쳤던 것처럼, 이 사랑, 이 능력, 이 재능,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토록 원하는 보답이 하나의 은사라는 점을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몰몬의 표현처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력 없이는 오지 않으며, 또 인내 없이도 오지 않으나, 구원 그 자체처럼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의 은사입니다. 인생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항상 복음에 따른 해결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해답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해답을 주고 받는 권세, 은사, 부여, 기적입니다. 사랑에 관한 이 일에서, 어떤 교리도 이보다 우리를 더 고무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제 말씀의 제목을 브라우닝 여사의 훌륭한 시 “제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Elizabeth Barrett Browning, Sonnets from the Portuguese [1850], no. 43.)에서 빌려 왔습니다. 이 아침에 “그 방법들을 일일이 상고해” 보지는 않겠지만 저는 그녀가 선택한 부사들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언제 제가 당신을 사랑하나요도 아니고, 어디서 또는 왜 제가 당신을 사랑하나요도 아니며, 어떻게라는 말을 사용한 점이었습니다. 어떻게 제가 그것을 설명할 수 있고 또 어떻게 여러분에 대한 저의 참된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브라우닝 여사가 옳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어떻게”에 잘 나타나 있으며, 몰몬과 바울이 우리에게 최대한의 도움을 주고 있는 것 역시 이 “어떻게”에 있습니다.

이 두 선지자가 가르친 신성한 사랑 곧 순수한 사랑의 첫 번째 요소는 그것이 지닌 친절함, 비이기적인 특성과 더불어 자아 및 허영, 그리고 쓸데없는 자기 중심적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아니”(모로나이서 7:45) 합니다. 모든 지도자들이 언급한 적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힝클리 회장님이 공개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가르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결혼에서의 대부분의 문제들이 궁극적으로는 이기심에서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가장 비이기적인 존재인 그리스도께서 위대한 모범을 보이셨던 이상적인 사랑을 살펴볼 때, 경전상의 이런 설명이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영원한 동반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여러분들이 친구와의 우정이나 진지한 데이트에서 찾고 싶어하는 많은 특성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특성 중 가장 우선적이고 기초적인 것들에는 분명 타인에 대한 보살핌과 세심함, 그리고 동정심과 예절이 명백히 깃들게 하는 자기 억제일 것입니다. 윌리엄 워즈워드는 “선한 사람의 생활에서 가장 훌륭한 부분은 그의 … 친절함이다”(Lines Composed a Few Miles Above Tintern Abbey [1798], lines 33~35)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연인이 못 본 척 해 주기를 바라는 많은 약점들이 우리 모두에게는 있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도 그가 원하는 만큼 멋있거나 아름답지는 않으며, 또 우리가 되고 싶은 만큼 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하거나 연설에서 재치가 있다거나 또는 부유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우리가 언제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다양한 재능과 운명을 가진 세상에서 우리가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매력적인 성품들은 곧 사려 깊음, 인내심, 친절한 말, 그리고 다른 사람의 성취를 진정으로 같이 기뻐하는 마음과 같은 성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한푼의 비용도 들지 않지만 그것을 받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교만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몰몬과 바울의 표현을 저는 좋아합니다. 교만하지 맙시다! 훌륭한 모습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너무도 자부심이 대단하고 위세가 당당하여 하늘을 찌를 듯하게 보이는 사람과 함께한 적이 있었습니까? 프레드 앨런은 자기 도취에 빠져서 홀로 연인의 거리를 걸어 가고 있는 한 이웃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참된 사랑은 우리가 자신을 살피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더 보살필 때 그 꽃을 피웁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위대한 속죄의 모범이며, 그것은 우리가 보이는 친절에서, 우리가 행하는 존경에서,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행하는 비이기심과 호의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은 깨지기 쉬운 것이며, 인생의 어떤 요소들은 그것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드러운 손이나 보살핌의 손길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많은 것이 손상될 수 있습니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주는 것은 어떤 인간 관계에서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조치입니다. 그것은 신앙, 즉 우리 모두가 기꺼이 행사해야 하는 신앙의 참된 행동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그렇게 한다면 결국 모든 것, 즉 우리의 모든 소망, 두려움, , 약점, 그리고 우리의 모든 기쁨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진지한 어떤 구애나 약혼 또는 결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지 않거나 또 그렇게 행하면서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입니다. 안전을 위해 우리의 한 쪽 다리를 강둑에 걸치고 있다면 우리는 사랑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본질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만큼 서로를 꼭 잡고서 함께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갈 것을 요구합니다. 배우자의 안전이 여러분의 손에 놓여져 있듯이 배우자의 장래의 흥망이 여러분의 손에 있으며 또 이러한 것이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양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그러한 정신 속에서, 그리고 순수한 사랑에 대한 몰몬의 호소하는 심정으로 여러분께 강조드리고 싶습니다.

 

홀런드 자매와 저는 거의 37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해 오고 있는데, 이 기간은 우리가 미혼으로 있었던 기간의 두 배에서 6 년 정도 빠지는 기간입니다. 저는 아내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37년 간의 가치를 알고 있으며 아내도 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아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알며, 아내도 저의 그런 것들을 압니다. 저는 아내의 기호와 관심사, 소망과 꿈을 알고 있으며, 아내 또한 저의 그런 것을 압니다. 우리의 사랑이 커지고 우리의 관계가 성숙되어 감에 따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서로 나누고 싶은 마음도 점차로 커져 왔습니다.

그 결과로 저는 아내를 도와 주는 방법을 더욱더 분명하게 많이 알게 되었으며, 마음만 먹는다면 아내를 마음 아프게 하는 것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완전한 헌신이 없었다면 참으로 우리의 사랑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내가 저를 그토록 믿고 있고, 또 경전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한 몸”(창세기 2:24)이 될 수 있도록 어떠한 자기 방위도 오래 전에 내던져 버렸는데도 제가 아내를 의도적으로 이용하거나 다치게 하여 고통을 준다면 하나님은 저에게 분명히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저의 이익이나 허영심, 또는 아내를 지배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 아내를 약화시키거나 방해하는 것은 그 순간에 남편의 자격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리하이가 “헛된 망상”과 “세상의 교만”(니파이전서 11:36, 12:18)을 따라 생활하는 사람들의 감옥이라고 말한 크고 넓은 건물에 저의 비참한 영혼을 유폐시키는 것입니다. 그 건물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생명 나무가 있는 들의 다른 끝에 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에서 그분은 질투하거나 우쭐하지도 않으셨으며 결코 본인이 필요하여 쓰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희생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의 행복, 곧 그분이 그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행복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친절하셨습니다.

데이트와 구애 관계에서 여러분을 과소 평가하고, 여러분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여러분의 고통을 즐거워 하며 심지어는 그것을 유머라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단 5분도 함께 있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서 여러분의 자부심, 여러분의 품위, 자신감, 여러분의 기쁨을 공격하는 사람이 없어도 인생은 힘겨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관심 속에서 여러분은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안전을 느껴야 합니다.

제일회장단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여성을 학대하는 것은 어떤 신권 소유자에게도 합당하지 않”으며 또 “하나님의 신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자기의 아내를 학대하[거나] [어떤] 여인을 천시하거나 상하게 하거나 부당하게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왔는데, 거기에는 아내는 말할 것도 없이 친구, 데이트 상대, 연인, 약혼자도 포함 됩니다.(제임즈 이 파우스트, “가장 영예로운 자리”, 성도의 벗, 1988 7월호, 42; 고든 비 힝클리, “사랑으로 친절히 대하자”, 성도의 벗, 1983 1월호, 120)

여러분이 피자를 먹으러 밖으로 나가거나 테니스를 즐기러 간다면, 좋고 깨끗한 흥미거리를 제공할 다른 사람과 같이 가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진지한 관계에 있거나 진지한 관계를 가지려고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 주위에서 가장 훌륭하고 여러분의 성공을 시기하지 않을 사람을 찾아서 같이 가십시오. 여러분이 고통을 겪을 때 같이 고통스러워 하고 여러분의 행복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는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모로나이서 7 45절에 있는 사랑에 관한 설교의 두 번째 부분은 참된 사랑, 곧 진정한 사랑은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성내지 아니하고, 서로에 대해 악한 생각을 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작은 실수조차도 즐거워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논쟁을 피할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상처 받은 감정이 치유될 수 있을지, 소외당하고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을지,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 얼마나 많은 별거와 이혼을 피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감정 폭발은 어린이라 할지라도 귀엽지 않습니다. 어른들, 특별히 서로를 사랑해야 할 어른들에게 그것은 천박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성내고 있으며, 또한 배우자가 우리를 해치려 한다고, 심지어 우리를 악하게 대하려 한다고까지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상대방이 실수를 하는 것을 보거나 그들 가운데 잘못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종종 즐거워 합니다. 이런 일에 대해 자제심을 발휘하도록 합시다. 조금만 더 성숙하게 행동하십시오. 필요하다면 입을 굳게 다물도록 합시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습니다.](잠언 16:32) 참아나가는 결혼 생활과 훌륭한 결혼 생활 사이에 있는, 적어도 한 가지 차이점은 후자의 경우 말참견과 반응이 없이도 어떤 일들이 흘러가도록 하는 의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전에 셰익스피어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사랑과 로맨스에 관한 말씀이니 로미오와 줄리엣을 언급할 것임을 여러분은 쉽사리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훨씬 덜 정숙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의 결말은 빗나간 무지의 결과로서, 보다 더 사태를 잘 알았어야 할 두 가문의 슬프고도 비통한, 일종의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오델로와 데스데모나의 이야기에서는 슬픔과 파멸이 의도를 가지고 행해졌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악의적으로 행해졌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아니 아마도 모든 문학 작품에 나오는 악당들 가운데서 제가 이아고 만큼이나 엄청나게 혐오하는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조차도 제게는 좋게 들리지 않는데, 적어도 전부터 그래 왔습니다. 그의 악행은 무엇이었으며, 그에 대한 오델로의 비극적이고도 거의 변명의 여지가 없는 예민성은 어떠했습니까? 그것은 모로나이서 7장과 고린도전서 13장을 침해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 가운데서, 그들은 존재하지도 않은 곳에서 악을 찾았으며 가상의 악행을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서 악한 인물들은 “진실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순진한 데스데모나에 관해 이아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의 정절에 흙칠을 하고 친절을 이용해서 그물을 만들고 그것으로 모두를 잡아들여야지”(William Shakespeare, Othello, 2, 3, 366~378) 의심과 악의에 찬 암시를 심어 놓고, 질투하고 속임수를 부리다가, 결국 사람을 죽일 듯한 분노에까지 이른 이아고는 오델로를 화나게 하여 데스데모나의 생명을 앗아가게 함으로써, 정절에 흙칠을 하고 친절을 악용하여 치명적인 그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실제이건 상상이건 간에 충실하지 못한 것, 또는 살인에 관해 말하고 있는 이 아침에 여기 행복의 계곡에서 하늘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대학 교육의 정신 속에서, 지금 배우고 있는 교훈을 배우도록 합시다. 서로의, 특별히 여러분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가장 좋은 점을 생각하십시오. 선한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의심하십시오. 에이브러햄 링컨이 “우리 본성에 깃든 보다 선량한 천사”(첫 번째 취임 연설, 1861년 3월 4일)라고 말했던 것을 자신에게 권장하십시오. 오델로는 그가 데스데모나에게 입맞춤을 하고 그녀의 순결이 명백해지는 마지막 순간에 구출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향기로운 입김. 정의의 사도가 이 냄새를 맡는다면, 칼을 부러뜨리고 싶을 것을”(5, 2, 16~17) 만일 오델로가 그 순간에 정의의 검이라고 여겼던 것을, 그녀에게 사용하지 않고 부러뜨렸다면 아내의 목숨을 구하고 자살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갖고 있던 한 사람이 악한 생각을 하지 않고, 악행을 즐기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하였다면,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아름답고, 행복한 결말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선지자들은 참된 사랑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고린도전서 13:7) 견딘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궁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분은 책임을 지고, 믿고, 소망하고, 견디셨던 위대한 모범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애와 우리의 결혼 생활에서 최선의 능력을 다해 이같은 일을 하라는 권유를 받습니다. 견디시고 강해지십시오. 소망과 신앙을 지니십시오. 인생의 어떤 것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또는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견디어야 합니다. 어떤 실망들은 사랑 안에서 그리고 결혼 생활에서 지니고 살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인생에서 누구도 바라지 않지만, 때때로 그런 일들이 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올 때, 그것들을 견디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슬픔과 어려움이 끝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들이 잘 풀릴 때까지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참된 사랑의 위대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이 시대에 서로 돕는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시련을 혼자 맞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부담을 덜어 주고 짐을 가볍게 하는 사람이 우리 편에 있을 경우 어떠한 일이라도 견딜 수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해 브리검 영 대학교에 있는 제 친구 브렌드 발로우 교수는 몇 년 전에 배의 최대 선적 용량을 알리는 플림솔 마크에 관해 제게 말해 주었습니다.

사무엘 플림솔은 젊었을 때 영국에서 배에 화물을 내리고 싣는 광경을 주의 깊게 보았습니다. 그는 곧 화물을 실을 수 있는 가능한 공간에 관계없이 각 배는 나름대로의 최대 선적 용량이 있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배가 그 한계를 넘어서면 바다에 가라앉을 위험이 있었습니다. 1868년에 플림솔은 의회에 들어가서, 다른 어떤 일보다도 배 한 척이 실을 수 있는 양을 산출하는 방법을 요구하는 상품 선적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 결과로 영국에서는 각 선체마다 어떤 선이 그어지게 되었습니다. 화물이 적재됨에 따라, 화물선은 점점 더 물 속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그러다가 수면이 플림솔 마크에 이르게 되면, 더 실을 수 있는 공간의 여부에 관계없이 그 배는 최대 용량만큼 적재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영국인들이 바다에서 죽는 비율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시대와 시기에 그들의 생애에서 각자 다른 용량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플림솔 마크를 세워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에서 그 표시를 찾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실려 있는 짐의 무게를 항상 지켜볼 필요가 있으며 연인이나 아내가 가라앉고 있다면 짐을 줄이거나 적어도 재조정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사랑의 배가 안정되면, 우리는 장기적으로 계속되어야 할 일, 다른 시기까지 연기할 일, 그리고 영구히 연기되어야 할 일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친구, 연인, 배우자들은 서로의 스트레스를 지켜보고 또 삶의 변화의 과정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계 용량을 말해 주고 그러다가 정서적 건강과 사랑하는 관계의 힘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도움을 주어 일부 짐을 내던지도록 하는 일은 우리가 지고 있는 의무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순수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같이 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몰몬과 바울은 자신들의 마지막 간증에서 “사랑[순수한 사랑]은 언제까지나 시들지 아니”(모로나이서 7:46; 고린도전서 13:8)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랑은 온갖 고통을 무릅쓰고 맑을 때나 흐릴 때나 견디며, 암울한 슬품을 헤치고 광명으로 나아옵니다. 사랑은 결코 시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기를 바라는 방법입니다.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명령에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 물론 데이트와 결혼 생활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인내의 힘은 우리 각자가 진정으로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그 이상의 어떤 힘으로 하늘에서 주어지는 은사를 요구합니다.

그러한 사랑, 곧 우리 각자가 동경하고 매달리는 사랑은 “참되게 따르는 자”에게 “내려주신”다는 몰몬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데이트와 로맨스에서, 결혼 생활과 영원한 세상에서 능력과 안전과 보호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의 진실한 제자가 되십시오. 순수하고, 단호하고, 언행이 일치되는 후기 성도가 되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에 여러분의 낭만과 관련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믿으십시오, 왜냐하면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데이트와 제자됨을 별도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것을 보다 좋게 표현하자면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연인을 위한 사랑과 행복의 길을 여러분이 성공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등불입니다. 제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그분께서 행하신 대로 하면 되는데, 이는 그 방법은 “결코 실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간증, 그리고 여러분과 주님에 대한 저의 사랑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으로 전해 드립니다. 아멘.

(“제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제프리 알 홀런드, 브리검 영 대학교 1999~2000년 말씀, 158~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