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설교, 병고침", 제프리 알 홀런드, CES모임, BYU, 2000년 8월 8일★]

가르침, 설교, 병고침
Teaching, Preaching, Healing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
   
십이사도 정원회

  (제프리 알 홀런드, 가르침, 설교, 병고침 리아호나 2003 1월호, 13)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저없이, 그리고 마땅히, 지금까지 살았고 또한 앞으로 살게 될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교사로 여깁니다. 신약전서에는 그분의 가르침과 말씀, 설교, 비유들이 가득합니다. 그분은 어떤 식으로든, 그 책 어느 곳에서나 교사로 등장합니다. 그분은 가르치기도 하셨지만, 그 이외에도 의식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는데, 바로 그 일이 그분의 가르침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 줍니다.

첫 제자들을 부르신 이후,(아직은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은 마태의 말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태복음 4:23)

그 가르침과 설교들은 우리가 알고 있고 또 바라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방식의 병고침을 볼 만큼 잘 준비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초기부터, 바로 그 첫 시간부터, 고침이라는 말은 마치 가르침과 설교의 동의어인 것처럼 언급됩니다. 최소한 그 세 가지 사이에는 명확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실, 다음 단락은 가르침이나 설교보다는 고침에 대해 더 많이 말해 줍니다.

마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24절)

그 다음에 그 훌륭한 산상 수훈이 주어졌습니다. 여섯 쪽 반에 걸쳐 나와 있는 이 내용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아마도 6년 반은 족히 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 설교가 끝난 순간 구세주는 산에서 내려와 다시 병을 고치셨습니다. 곧바로 그분은 나병 환자와 백부장의 하인,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고, 이어 “귀신들린 자들”(마태복음 8:16)이라고만 언급된 많은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간단히, 경전은 그분이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무리로 인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신 그분은 이어서 무덤 사이에 살고 있던 두 사람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냅니다. 그리고 다시 배에 오르사 “본 동네”로 건너가십니다.(마태복음 9:1) 그 곳에서 주님은 중풍에 걸려 침상에 눕게 된 한 남자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를 고치시고,(제 생각에 이 일은 신약전서를 통틀어 가장 놀랍고도 아름다운 순간인 듯합니다.) 관리의 딸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십니다.

그 후에 그분은 두 맹인의 시력을 회복해 주셨으며, 이어서 한 남자에게서 말할 능력을 뺏아간 악마를 쫓아내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역을 설명하는 신약의 처음 여섯 장의 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여러분에게 친숙하게 들리는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태복음 9:35)

이것은, 몇 단어만 빼놓고, 우리가 앞서 다섯 장에서 읽은 구절과 똑같습니다. 그 다음 내용은 이렇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36~38절)

예수께서 이 열둘을 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태복음 10:6 ~8)

우리는 구세주가 위대한 교사라는 것을 압니다. 그분은 정말 그러하며 그 이상이십니다. 그분께서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너무 적다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가르칠 필요가 있는 사람들과 선교사들에 대해 즉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부름은 특정한 부류의 교사, 즉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 치료하는 교사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명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고침”은 신권의 공식적인 사용이나 병자를 위한 의식 집행, 혹은 그와 유사한 어떤 것들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 조직에서 교사로 부름 받은 사람들의 역할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의 가르침이 영적인 종류의 고침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마태의 기록 중 많은 내용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궁핍하고 어렵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행하신 구세주의 성역의 정황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구세주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삶에 일어나는 고침으로 우리 가르침의 성공 여부를 측정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가르치실 때, 그저 수업을 하시기보다는 영적으로 눈이 먼 농구 스타가 정말 볼 수 있도록, 영적으로 귀 먹은 동창회 미인이 정말 들을 수 있도록, 혹은 영적으로 발을 저는 학생회 회장이 정말 걸을 수 있도록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매우 강력하게 강화시켜서 사탄이 어떤 유혹을 던져도 맞설 수 있고, 그래서 그 순간에 진실로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우리가 좀더 노력할 수는 없을까요? 조금 더 노력해서 매우 강력하게, 매우 영적으로 가르침으로써 정말로 홀로 걷고, 홀로 살고 있는, 또는 어두운 밤에 홀로 울고 있는 개인들을 도울 수는 없을까요?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아마도 십이사도 정원회 생활로부터 얻은 한 가지 교훈이 제가 이 점에 관한 것을 말씀 드리고, 또 여러분이 혼동을 피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명교사이신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 대리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님이 우리가 십이사도 내에서 서로에게 발표를 하거나 일종의 권고 같은 것을 나눌 때면 하시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분은 “다 끝났습니까?”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시면서 발표자에게(그러면서 넌지시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저는 이것이 그분의 가르침, 그리고 설교와 분리할 수 없는 요소로서 구세주께서 날마다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분의 제자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그분의 설교와 권고는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여러분과 저는 말하는 것과 믿는 것과 실제로 생활하는 것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르침이 변화를 가져오도록 기도하십시오. 이제는 잊혀진 노래의 가사처럼, 여러분의 가르침이 문자 그대로 “누군가를 일으켜 올바르게 날게”하도록 기도하십시오.(Nat King Cole, “Straighten Up and Fly Right”[1943]). 우리는 그들이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올바르길 바랍니다. 그들이 축복 받기를, 이 삶에서 행복하기를, 다가올 세상에서 구원 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관리하십니다.

신약에서 부활 이후의 일들을 소개하고 있는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책에서 교회와 관련이 있는 중요한 개념을 전해 줍니다. 즉 사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자로 성임되었으며 그럼으로써 그분의 이름으로 교회를 계속 이끌어 나갈 권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직면했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시고 난 후 새롭고 작은 그리스도 교회 회원들이 당면한 황폐한 사태와 고난과 두려움, 혼동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분명 몹시 두려워하고 혼란스러워했을 것이며 제자들은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했을 것입니다.

놀랄 것도 없이, 교회는 처음부터(최소한 사도행전의 첫 구절부터)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계속 인도된다고 선언되었습니다. 무서운 혼란과 두려움의 시기에 이러한 말을 듣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정말, 사도행전의 더 완전한 제목은 “주님이 성임하신 사도들의 삶과 성역에서 성신을 통하여 일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행적”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이 제목을 들어 보시면 여러분은 왜 누군가가 더 짧은 제목에 찬성표를 던졌는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제안한 이 제목이 더 정확한 제목입니다! 누가의 첫 기록에 귀기울여 보십시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사도행전 1:1~2)

교회의 방향은 똑같았습니다. 구세주가 계신 곳은 바뀌었지만 교회의 방향과 지도력은 정확히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소개의 말이 있은 후에 우리는 성신을 통해 도처에서 주님의 나타내심이 있었다는 것을 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사도행전에서 십이사도에게 주신 첫번째 가르침은 그들이 “성령(성신)으로 침례를 받으리라”(사도행전 1:5)는 것과 “오직 성령(성신)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8절)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베드로는 교회의 나머지 회원들을 모았습니다. 모두 합해서 백 이십 명 이었습니다.(이러한 고난과 반대들이 그들의 수에 얼마나 충격을 주었는지 아시겠습니까?) 백 이십 명이 모였으며,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성령(성신)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사도행전 1:16) 십이사도에 생긴 유다의 공석을 메우기 위해, 그들은 오늘날 십이사도 정원회와 제일회장단이 기도하는 방식과 정확히 똑같은 방법, 즉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사도행전 1:24)었는지 보여 주소서 라고 기도했으며 맛디아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을 쳐다보게 하고, 교회를 계속 이끌어갈 신성한 인도를 너무도 명확하게 극화시킨 그 첫 번째 장은 단지 2장에 대한 준비일 뿐이었습니다. 그 구절에서 오순절이라는 말은 특별한 영적인 나타내심과 성령(성신)이 신성하게 사람들에게 쏟아 부어지리라는 말과 동의어로서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어휘가 되었습니다. 계시가 하늘로부터 왔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 온 집에 가득”(사도행전 2:2)했고 그들을 가득 채웠습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 그들이 다 성령(성신)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사도행전 2:3~4)

교회의 회장이자 선임 사도였던 베드로는 일어나서 이러한 충만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요엘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사도행전 2:17~18)

베드로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그는 더 많은 회중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으라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 너희 가운데서 …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성신)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사도행전 2:22, 32~33)

장엄한 구절입니다. 아직 침례 받지 않은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무엇을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침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고 “성령(성신)의 선물을 받으”(사도행전 2:38)라고 했으며 그들 중 삼천 명이 그렇게 했습니다. 나중에, 걷지 못하는 사람을 성전 계단에서 일으켜 세워 그가 건강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놀라운 일을 행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꾸짖으며 그 사람은 인간의 권능이나 제자들의 경건으로 걷게 된 것이 아니라 이 예루살렘 사람들이 “넘겨 주”어“죽[인]”(사도행전 3:13~15) 예수로 인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성령을 도구로 하여 여전히 교회를 이끌고 계시며 주님이 다시 오셔서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사도행전 3:21) 그럴 것이라고 간증했습니다.

오천 명이 더 교회에 가입했을 때, 지역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졌는지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해 주어야 할 가장 훌륭한 대답을 주었습니다. 그는 “성령(성신)이 충만하여”그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사도행전 4:8, 10)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그분의 사도들의 행적을 이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같은 영에 의하여 그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고대나 현대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운영 방식에 관한 교훈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신을 통해 그분들의 영향력을 교회 지도자들과 교사들, 그리고 개개인에게 미치시면서 여전히 이 사업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가르치는 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영으로 가르침

성령으로 가르치십시오. 그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경전에서 정의한 것처럼 “다른 어떤 방법”(교리와 성약 50:17)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떤 다른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학생들에게 영적인 경험을 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신약전서가 여러분에게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서의 메시지입니다. 사도행전의 메시지입니다. 모든 경전의 메시지입니다. 그 성스러운 기록들에서 얻는 영적인 경험들은 신약 시대의 회원들에게 그랬던 것과 똑같이 오늘날 교회에서 사람들이 올바른 길에 서 있을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경전은 이렇게 말합니다.그리고 영은 신앙의 기도로써 너희에게 주어지리니, 만일 너희가 영을 받지 아니하거든 가르치지 말지니라.”(교리와 성약 42:14) 이 구절은 단지 여러분이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가르칠 수 없다, 혹은 매우 수준이 떨어지게 가르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강한 강한 어투입니다. 이것은 동사의 명령형입니다. “Ye shall not teach(가르치지 말라)”에서 “Ye”라는 말을 “Thou”로 바꾸면 시내산에서 주어진 어투가 됩니다. 이것은 계명입니다. 이들은 여러분의 학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학생들입니다. 바로 이 교회가 베드로나 바울, 조셉, 브리감의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처럼 말입니다.

기운을 내십시오. 여러분이 알거나 인식하도록 특권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방법으로 영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정직하고,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한 순수하게 살려고 노력한다면 생각한 것 이상의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겟세마네와 갈보리 그리고 승천이라는 최고의 절정에 달하는, 거의 가르치기 불가능한 순간들에 다다르면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적용할 수 있는 다음의 두 가지 일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끝까지 충실하셨다

먼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기진 맥진함 속에서도, 그리스도는 끝까지 충실하셨습니다.

마태는 주님이 “슬퍼하사 …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마태복음 26:37~38) 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일부러 제자들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시고 혼자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분은 이 일을 홀로 하셔야 했습니다. 그분은 무릎을 꿇으시고, 사도들은 그분이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마태복음 26:39)렸다고 말합니다. 누가는 주님이 “힘쓰고 애써”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더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4)고 말했습니다. 마가는 그분이 땅에 엎드리어 “아빠 아버지여”라고 울부짖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신학이 아닙니다. 바로 아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마가복음 14:36)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제발 이 잔을 제게서 옮겨 주세요.”라는 자녀의 간청을, 더군다나 이렇게 완전한 자녀의 간청을 누가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 기도 전체는 만약 가능하다면 이 시간이 그 계획으로부터 거두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다른 길이 있거든 그 길을 가게 해 주시옵소서, 만약 다른 길이 있다면, 다른 길이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받아들이겠습니다.”마태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라고 기록했고, 누가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누가복음 22:42)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잔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님은 그분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맡기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22:42) 그것은, 모든 의도와 목적에 있어서, 예수님이 지상 성역을 하시는 동안 아버지와 아들 간에 나눈 신성한 대화의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구대륙에서의 그 마지막 선언에서부터 우리는 신세계에서의 이 첫번째 선언을 듣습니다. 성전에 모인 니파이인들에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나는 … 예수 그리스도라 … 나는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저 쓴 잔을 마시고 태초로부터 모든 일에 아버지의 뜻을 담당하였느니라.”(제3니파이 11:10~11) 그것은 자신에 대한 그분의 소개, 즉 자신이 누구인지 이 사람들에게 가장 잘 설명해 줄 것이라고 주님이 판단하신 선언입니다.

만약 반원들에게 구세주께서 그들을 위해 치르신 비할 데 없는 희생과, 그들의 죄에 대해 주님이 치르신 값과 슬픔에 답해 한 가지 주요한 결심을 하게 할 수 있다면 순종해야 할 필요성, 즉 그 대가가 아무리 크더라도 어려운 결정의 시간에 “아버지의 뜻”(제3니파이 11:11)에 따라야 할 필요성을 남겨 주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이나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항상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추구하는 바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덕성보다도, 위대한 설교보다도, 심지어 병 고침보다도 더 구세주께서 그분의 성역에 대해서 강조하고 싶어하셨던 것은 그분이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고집이 센 사람들입니다. 그런 까닭에 구세주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마련하신 메시지는 우리의 제물이 그분의 제물처럼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제3니파이 9:20, 교리와 성약 59:8 참조) 우리는 편협한 자아를 깨뜨리고 우리의 죄와 세상의 죄로 인해 슬퍼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따르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주님과 견주어 보는 불경함을 범하지는 말되, 지나갈 수 없는 그 잔은 그분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도 온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것은 훨씬 약한 방법으로 훨씬 약한 정도로 옵니다만 어떤 일이 있어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길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고 싶은 속죄의 두 번째 교훈은 첫 번째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만약 이미 너무나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고 느낀다면, 그리스도의 밝은 빛에 못 미치는 수준에서 살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용서하려는 성향”을 갖고 계시며, 그리스도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오래 참고 선함으로 가득 찬 분이라는 것을 가르치십시오.(Lectures on Faith [1985], 42쪽) 자비는 바로 그 자매 격인 회개, 용서의 덕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중심에 있습니다. 복음의 모든 것은 우리가 진정 원하기만 한다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진심으로 구하기만 한다면 도움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과거의 문제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온전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삶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이 여행을 하는 우리 모두를 위해 마련된 도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에 따르고 순종하라고 명하실 때, 그분은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어떤 도움을 주실지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 길을 걸으셨으며, 우리에게 그분이 하신 일을 하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여행을 훨씬 더 쉽게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날카로운 돌이나 걸림돌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아시며 어느 곳에 가시와 엉겅퀴가 가장 무성한지도 아십니다. 어느 곳에서 길이 위험해지는지 아시며,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이 어디서 갈라지고, 언제 밤이 오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모든 종류의 고통과 고난과 시험을 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그들의 약점에 따라 어떻게 도울지 알고 계십니다.(앨마서 7:11~12참조) 돕는다는 말은 “달려간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뻗치신 자비로운 팔을 우리가 받아들이려고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달려오실 것이라는 것과, 심지어 지금도 달려오고 계시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우리가 흔들리고 넘어질 때, 그분은 우리를 잡아 주고 강화시키기 위해 그 곳에 계십니다. 결국 그분은 우리를 구해 주시기 위해 그 곳에 계시며, 이 모든 것들을 위해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나날들이 아무리 어두워 보일지라도, 세상의 구세주는 훨씬 더 어두운 나날들을 겪으셨습니다. 그 날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부활된 육체에서도, 즉 완전한 육체에서도 그분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난 상처들-바로 표적들을 간직하기로 하셨습니다.

그것은 원할 경우, 그 고통스러운 일이 순수하고 온전한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며,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과, 문제들은 지나가고 행복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는 표적입니다. 우리 영혼의 대장이 상처를 입으신 그리스도라는 것과, 우리를 용서하면서 생긴 상처와, 사랑과 겸손으로 생긴 부상, 순종과 희생으로 찢기신 살을 아직도 지니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십시오.

이 상처들은 그분이 오실 때 우리가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증거들입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를 앞으로 나오게 해서 그 자국들을 보게 하고 만져 보게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 전이 아니라면, 확실히 그 때에, 우리는 이사야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를 위해 “멸시를 받아 버림받[고] …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가 되셨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이사야 53:3, 5)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일을 사랑합니다. 금년에 여러분께서 위대한 신약전서와 그것이 증거하는 그분의 삶에 몰두 할 수 있는 여러분의 기회를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 교회는 그분의 교회이며, 위대한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우리는 경전을 사랑하고 거기에서 배우며 그것들이 참됨을 서로에게 증거하는 훌륭한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

(제프리 알 홀런드, 가르침, 설교, 병고침 리아호나 2003년 1월호, 13)

2000년 8월 8일, 브리감 영 대학교에서 열린 교회 교육 기구 종교 교육자 대회 말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