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마빈 제이 애쉬튼(1915~1994), 성도의 벗 1992년 7월호★]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The Tongue Can Be a Sharp Sword

마빈 제이 애쉬튼 장로(1915~1994)
   십이사도 정원회

   “양육하고 사기를 높여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해심과 용서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 다른 사람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찾는 사람이 되십시오.”

(마빈 제이 애쉬튼(1915~1994),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162차 연차대회, 성도의 벗 19927월호, 18)

 시편 57편에 보면 다윗 왕은 자비를 간구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시편 57:4)

오늘날 세상에서 우리는 혀를 날카로운 칼같이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대중매체나 일반 개인이 이처럼 혀를 잘못 사용하는 일을 즐기고 있는데 우리마저도 혀를 잘못 사용한다면 음모와 파멸이 더욱 가중될 것 같습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말로 이 파괴적인 행동은 후려갈기기라고 합니다. 사전에서는 후려갈긴다는 말을 결정적인 강타를 날리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 가족을, 공무원을, 지역사회를, 나라를 그리고 교회를 혹독하게 비난하는 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보편적인 행동에 빠져 들어 있습니다. 또한 자녀들이 부모를, 부모들이 자녀를 혹독히 비난하는 것을 우리가 너무 자주 발견하게 되는 것 또한 하나의 경종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 회원으로서 우리는 악한 말 금하세라는 말이 찬송가 가사의 의미를 넘어 바람직한 삶의 방법까지도 의미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찬송가, 105) 우리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 더 자주 “무엇이든지 유덕하고 사랑할 만하거나 혹 듣기 좋거나 혹 칭찬할 만한 일이 있으면 우리는 이것들을 구하여 마지 않는다.”라는 신앙개조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훈계를 따른다면 사기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혹독한 비난을 가하는 악취미를 즐길 시간이 없습니다.

복수하거나 관심을 끌거나 이득을 취하거나 승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바로 다른 사람들을 혹독하게 비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인격과 명성 그리고 자존심이 이 같은 악의적인 행동이라는 망치에 파괴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만일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좋은 점을 말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말하지 마십시오."라는 단순한 가르침과는 동떨어지게 벗어나서 너무나 자주 스스로를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비록 나쁜 품행이나 나쁜 행동에 관한 소식과 소문을 쉽게 접할 수 있으며 그러한 것이 상처를 입히거나 혹독하게 비난하거나 손해를 입히는 사람들에 대한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지만, 구세주께서는 우리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요한복음 8:7참조)

 추악한 소식과 대화는 언제나 불결하고 충격적인 것을 퍼뜨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용 가치가 높습니다. 우리 중에 완전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찾아내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쉽게 찾아 낼 수 있는 약점이 있습니다. 현미경으로 보듯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확대시키기만 하면 파괴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사건이나 특성을 우리는 거의 모든 사람의 삶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 내에서 선한 것과 칭찬 받을 만한 것을 인정하는 기본 원리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의 밤을 다시 강조하여, 건전한 대화와 가르침을 위한 도구나 기초로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른 식구나 이웃이나 교사나 지도자를 혹독하게 비난하는 기회로 삼아서는 절대 안됩니다. 우리가 듣기 좋은 것들을 추구하면서 선하고 긍정적인 것을 강화하고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을 억제할 때 가족의 충실성은 나타나게 됩니다. 시대를 앞서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혹독하게 비난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정적인 심한 비난으로 자신을 파멸시키거나 개인의 발전이나 교회의 발전을 저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여섯 분의 미합중국 대통령의 고문을 지낸 버나드 바루치씨는 적대자의 공격으로 인해 마음이 상한 적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아무도 저에게 창피를 주거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 그렇게 하게 하지는 않을테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분이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어떤 목적을 위해 혹독히 비난하는 데 시간과 정력을 쏟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인생의 곤경에 처할 때 침묵을 지키도록 조용한 모범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셨다는 것을 상기합니다.

그렇다면 감정을 상하게 하고 다른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며, 관계를 단절시키고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이 혹독한 비난에 대한 해독제는 무엇일까요? 혹독한 비난은 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모로나이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런즉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만일 너희에게 사랑이 없으면,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니, 이는 사랑은 언제까지나 시들지 아니함이라. 그런즉 모든 것 중에 으뜸이 되는 사랑을 붙들라. 이는 모든 것이 반드시 시들되 -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이라. 영원히 견딤이요,"(모로나이서 7:4647)

 

아마도 사랑이란 여러 가지로 오해되고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병자를 방문하거나 궁핍한 자들에게 음식을 전하거나 덜 가진자들과 우리의 가진 것들을 나눔으로써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참된 사랑은 훨씬 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남에게 어떤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어떤 것을 얻고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사랑의 미덕이 심어질 때, 여러분은 완전히 딴 사람이 됩니다. 바로 그러한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혹독한 비난자가 되는 것을 혐오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가장 큰 사랑은 우리가 서로에게 친절할 때,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어떤 범주 속에 집어넣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노하기보다는 좋은 의도가 있겠지라고 단순히 생각하거나 조용히 있을 때 생기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차이점과 약점과 단점을 수용하거나 우리를 실망시키는 사람들에게 인내심을 갖고 대하거나 다른 사람이 우리가 바라던 대로 어떤 일을 처리하지 않을 때 화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며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서 우리가 어떤 일에 실패했거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누군가 우리를 혹독히 비난하거나 지적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약점을 개의치 않고 우리를 지지해 주고, 인내심으로 가르치며, 우리를 신뢰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믿는 가족, 친구, 고용주, 그리고 형제, 자매들입니다우리가 다른 사람의 행동에 좋은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성공하거나 성취하기를 바라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또 왜 서로를 격려해 주지 않습니까?

 

사탄이 말일에 쓰는 책략의 하나가 사람들 가운데 증오심을 일으키는 것임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사탄은 우리가 서로 비난하고, 우리 이웃의 결점을 갖고 놀려대거나 그것을 이용하며, 일반적으로 서로의 흠을 들추어내는 모습을 좋아합니다. 몰몬경은 모든 분노와 악의, 탐욕과 증오가 어디서 오는가를 분명히 밝혀줍니다.

니파이는 말일에 악마가 “사람의 자녀들의 마음 속에 맹위를 떨쳐, 선한 것에 대하여 노하도록 그들을 충동”(니파이후서 28:20)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우리가 늘 보고 있는 뉴스매체에 묘사된 내용에 의하면 사탄은 활동을 썩 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뉴스보도라는 명목으로 우리는 종종 탐욕, 강탈, 폭력적인 성범죄, 그리고 기업의 경쟁자들, 라이벌이 되는 운동 선수들, 또는 정적들 사이의 모욕에 관한 생생한 장면, 다시 말해 원색 그대로 묘사된 장면을 너무 자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경전을 통틀어 보면 하나의 공통된 주제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먼저 산상수훈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 부름 받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첫 번째 설교였습니다. 구세주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여러 면에서 그분에게로 나아오는 것에 관한 가장 훌륭한 지침이 됩니다. 이 주제는 사랑, 동정심, 용서, 오래 참음 등과 같은 미덕, 다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더 많은 인정을 가지고 대할 수 있게 해 주는 자질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십이사도들에게 주신 구세주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그들과 (우리는) “형제와 화목하고”(마태복음 5:24) “너를 송사하는 자와 급히 사화하며”(5:25) “원수를 사랑하고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행을 하며 (우리를) 나쁘게 이용하는 자들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5:44 영문참조)는 훈계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5:39)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 부름 받은 사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선택한 첫 번째 원리들은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미대륙에 있는 니파이인들과 보낸 짧은 기간 동안 무엇을 강조하셨습니까?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메시지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대하는 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초이기 때문에 그렇겠습니까?

 

한 그룹의 성인 후기성도들과 가진 비공식 노변의 모임에서 말씀을 하던 지도자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마음을 돌이켰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여 회원들의 참여를 유도하였습니다. 45분 동안 참석자들은 이 질문에 여러 가지 답변을 하였으며, 지도자는 주의 깊게 큰 칠판에다 그 대답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갔습니다. 모든 답변이 사려 깊고 적절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이 훌륭한 교사는 자기가 적은 것을 모두 받아들일 만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가장 좋고 가장 명확한 지표는 바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잠시 이 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자신의 가족을, 자신의 친구를, 그리고 매일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가 때때로 강조하는 매우 주목할 만한 몇 가지 복음원리와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합니다.

 

지난달 상호부조회 창립 15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습니다. “사랑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는 상호부조회의 모토는 전세계의 상호부조회 자매들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의 방법이 되어 왔습니다.

 만일 우리들 각자가 서로 소중히 여기고 보살피며 위로한다면 오늘날 세상에서, 우리의 와드에서, 우리의 가족사이에서, 또는 신권 정원회와 보조조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어느 날 아침 스테이크 상호부조회 회장단에서 봉사하며 동시에 매우 도전적인 계획에 대한 중압감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는 한 젊은 자매가 회장단 모임에서 화를 냈습니다. 그 자매의 불쾌감의 원인은 현안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별로 없었으며, 오히려 중요한 임무에 대해 가정에서 심한 압력을 받으면서 노력하고 있는데다 좌절감을 느끼며 정서적으로 탈진해 있다는 사실에 더 관련이 깊었습니다. 잠시 후 그 자매는 자신의 행동 때문에 당황하였으며 즉시 자신의 감정을 폭발한 것에 대한 용서를 빌었습니다. 회장단에서 함께 일하는 그 자매의 동료들은 마음이 너그러웠으며 그 자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여전히 그 자매는 그들이 자신의 약점을 본 이상, 자기를 낮추어 보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식사 시간 무렵에 현관의 벨이 울렸으며 그 현관에는 회장단의 다른 자매들이 음식을 갖고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 자매님께서 화를 내셨을 때 틀림없이 지쳐있음을 알았어요. 그래서 간단한 음식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지요. 우리가 자매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래요.” 그 자매는 놀랐습니다. 그날 아침 자신의 감정 폭발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친구들은 비판은커녕 오히려 도움을 주려고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자매를 혹독하게 비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랑의 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양육하고 사기를 높여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해심과 용서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 다른 사람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찾는 사람이 되십시오. 만날 때보다 헤어질 때 더 좋은 인상을 남기도록 하십시오. 사업이든, 운동이든, 또는 다른 어떤 분야이든 여러분의 경쟁자들에게 공정하십시오. 협박이나 음해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이길 수있다고 생각게 하는 요즘 유행하는 말에 속지 않도록 하십시오.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나 외로운 사람들 또는 짐 진 자들을 도와주십시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우리 각자가 당면하는 독특한 문제를 이해한다면, 저는 우리가 더 큰 사랑과, 인내와 관용과 보살핌으로서 훨씬 더 부드럽게 대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사탄이 우리가 서로 비난하거나 결점을 찾고 혹독하게 비판하며, 음해하거나, 비판하거나 창피를 주거나 조롱하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는 싸움에서 절반은 이긴 것이 됩니다. 왜 그러냐고요? 비록 이 같은 행동이 중죄에 빠지는 것과 같지는 않을지라도 우리의 영성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말다툼이나 비판이나 다툼이나 혹독한 비난이 있는 곳에는 주님의 영이 거할 수 없습니다.

성경 시대에서 조차 야고보는 우리에게 혀를 다스릴 필요성에 대해 경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사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야고보서 3:56)

 

저는 우리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마음을 돌이켜 그분에게 헌신할 때 다음과 같은 흥미 있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의 복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며,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점점 인내심, 친절, 부드러운 포용 심 그리고 자신의 생애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싶은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개심의 시작입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우리의 현재 모습 그대로 서로 받아들이며, 모두가 능력껏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혹독한 비난으로 파멸시키기 보다는 사랑과 격려가 담긴 조용한 메시지를 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도록 합시다.

또 야고보는 우리에게 다음 말을 상기시켜 줍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야고보서 3:18)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단체로나, 오늘뿐 아니라 언제나 혹독한 비난이 사랑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가르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 주시길 기원하며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씀 드립니다. 아멘.

(마빈 제이 애쉬튼(1915~1994),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제162차 연차대회, 성도의 벗 1992년 7월호,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