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치 로스 워크맨, “죄의 사슬을 끊음” 리아호나, 2006년 7월호]

죄의 사슬을 끊음
Breaking the Chains of Sin

  욕망이나 열정의 대상을 희생하는 것은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열쇠입니다.

   에이치 로스 워크맨 장로
   칠십인

  (에이치 로스 워크맨 장로, 죄의 사슬을 끊음 리아호나 2006 7월호, 36-39)

 노예 제도라는 사악한 관습은 세계 역사를 통해 여러 문명 가운데 존재해 왔습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이 상품으로 매매되고, 타인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장기적인 비극에 처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따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록에서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간성”이라는 설명에 몸을 움츠리게 되고, 심지어는 세계의 일부 지역에 아직도 노예가 존재하고 있다는 보고에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자유를 포기하고,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오로지 “자기처럼 비참하게 되게”(니파이후서 2:27) 하는 것이 목적인 주인에 의해 속박 당하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영적인 속박

많은 사람들이 속박이란 단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감옥에 갇히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신체적 속박은 끔찍한 것이지만, 그 결과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더 큰 구속은 거짓의 아비에게 속한 것으로서, 그 속박의 형태는 훨씬 더 참혹하고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영적인 속박은 사람이 통제되지 않은 욕망과 열정에 자신을 내맡기는 개인적인 선택의 결과로 옵니다. 사람은 죄를 짓거나 명성, 부, 정치적 권력, 혹은 사회적 신분 등과 같은 세상의 영예를 추구할 때 속박 당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또한 스포츠, 음악 혹은 유흥과 같은 활동에 지나치게 몰두함으로써 속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강력한 속박의 근원은 전통입니다. 전통은 모든 문화의 일부입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부족의 전통이 뿌리 깊게 존재합니다. 이 전통 가운데 일부는 훌륭하고, 문화를 존속시키며 사회 질서를 유지합니다. 다른 전통들은 복음과 신권의 다스림에 역행하며,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를 때 속박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심지어는 개인 및 가족의 전통조차도 영적인 속박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복음의 원리에 상반되는 전통은 영을 거스르며, 그 전통을 따를 경우, 더욱 많은 자유를 부여해 줄 의로운 선택을 인식하도록 영의 인도를 받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관한 가족의 전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요한 스포츠 행사가 교회의 책임과 겹칠 때 여러분의 가족은 그 상황에 대해 어떻게 느낍니까? 의롭지 못한 영향력에 굴복하면 여러분의 자유는 줄어들고 속박의 위험은 커집니다.

 

한 번에 조금씩

 “마땅한”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주신 은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와 영생을 택할 수도 있으며, 악마의 능력에 따라 속박과 죽음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니파이후서 2:27 참조) 우리에게는 무엇이든 원하는 길을 선택할 자유가 있으나, 그 선택의 결과를 피할 자유는 없다는 말을 흔히 듣게 됩니다.

영적인 속박이 단 한 번의 선택이나 사건으로 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자유는 한 번에 조금씩 함락되어 결국은 그 자유를 되찾는 일이 불확실해지는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한 젊은이가 제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집에 있는 컴퓨터를 통해 접하게 된 외설물에 중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 모임에 참석하거나 신권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만큼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사회 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유혹에 이끌려 몇 시간이고 컴퓨터 앞에 혼자 앉아서 좌절과 절망만을 가져다 준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마치 자신처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주인에 의해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컴퓨터 화면의 노예가 되겠다고 한순간에 결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는 그것을 보기 전에 파괴적인 영상을 “이번 한 번만” 보는 것은 해가 되지 않을 것이며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여러 번이 되면서 강력한 중독성은 그의 선택 능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중독의 사슬에 매인 후에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기꺼이 속박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속박에 자신을 내맡길 경우,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자유가 점차 상실되어 가는 것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속박을 경험하고, 선택하고, 혹은 허락할수록, 영적으로 중요한 일에서 우리가 느끼는 선택의 자유는 점점 더 줄어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속박이 그들의 통제 밖에 있는 어떤 것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그것이 정말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의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는 욕망이나 열정의 대상을 기꺼이 희생하는 의지에 의해 측정됩니다. 그러므로, 희생은 인도하는 원리이며 자신을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는 열쇠가 됩니다.

 

희생의 예: 부부 선교사

신체적, 재정적으로 능력이 허락되는 부부는 전임 선교사로 봉사하도록 희생할 것을 권고 받고 있습니다. 건강이 좋지 못하거나 재정적으로 부족하거나 기타 다른 상황은 분명 봉사할 수 있는 능력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봉사하지 않는 이유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세상적인 욕망의 포로가 되는 위험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집, 자동차, 혹은 배에 대한 염려, 투자에 대한 집착, 여행 계획, 여름 별장에 대한 소망 및 이와 유사한 장애물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여러분은 선교사로 봉사하겠다는 선택을 하기 위해 자유롭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세상적인 것들에 의해 속박을 당하기로 선택했습니까?

신앙심 깊은 한 부부가 내린 선택을 고려해 보십시오. 최근에 은퇴를 위해 농장을 구입한 후, 이 부부는 선교사 부름을 받아야겠다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집을 짓고, 우물을 파고, 개인적인 모든 필요 사항을 스스로 해결하고, 자전거로 전도를 했습니다. 생활 환경은 몹시 힘들었지만, 그들은 회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고, 개종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훌륭한 성공을 맛보았습니다.

이 부부는 선교 사업을 하는 동안 가족으로부터 농장에 도둑이 들어 모든 농기구와 기계들을 훔쳐갔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빨리 돌아와 필요한 재산들을 되찾도록 하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선교부 회장은 그들에게 그렇게 해도 좋다고 허락했습니다. 이 부부는 어떤 결정을 할지 생각해 본 후, 그곳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것에 의해 속박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봉사하는 일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으며,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습니다.

 

발람의 교훈

저는 속박과 자유에 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구약의 선지자 발람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발람은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녀들을 인도하고 있던 당시 모압 변경에 거주하고 있던 이스라엘인 선지자였습니다. 시내 지방을 가로질러 여행하는 이스라엘 자녀들의 침입을 두려워한 모압 왕 발락은 발람에게 그들을 저주해 달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발람은 이 문제에 대해 주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발람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민수기 22:12)

발람이 주님의 응답을 알렸을 때, 왕의 신하들은 엄청난 부와 세상적인 영예를 선물로 주겠다는 점점 더 큰 약속으로 발람을 유혹했습니다. 처음에 발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거절하자 모압 왕은 재물과, 지위와, 정치적인 영향력으로 그를 유혹했습니다. 왕의 영예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커가면서 발람은 한 걸음씩 신성한 부름에서 멀어졌습니다. 마침내 그는 왕이 약속한 선물들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이스라엘 자녀들을 저주하는 일을 공모합니다.(민수기 31: 16 참조) 그는 왕이 약속한 재물과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칼에 목숨을 잃었고, 한때 그가 누렸던 영적인 자유를 잃었습니다.(민수기 31:8 참조)

 

그리스도의 모형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난 때문에 속박 당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난은 물론 사람이 내릴 수 있는 선택을 일부 제한시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관점에서 볼 때 가난은 속박의 근원이 아닙니다.

필멸의 예수께서는 소유물이 거의 없었으며 식량과 생필품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속박 당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고 아버지의 모든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궁극적인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주님은 충실한 자들을 시험하기 위해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부유한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태복음 19:21)고 하셨습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개척자 성도들은 교회를 “모든 산 위에”(이사야 2:2) 세우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희생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기록된 그의 설교에서 리하이는 아들들에게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너희를 묶고 있는 무서운 사슬을 떨쳐 버리기를 바라노라. 그것은 사람의 자녀들을 결박하는 사슬이니, 그들이 사로잡혀 비참과 고난의 영원한 심연으로 끌려 내려가느니라.”(니파이후서 1:13) 그의 말씀은 구주의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한복음 8:34)

그렇다면 영적인 속박의 “사슬을 떨쳐” 버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회개를 통해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으로 구주를 바라볼 때 그분은 자비로운 권능으로 우리의 힘을 키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내리는 모든 의로운 선택은 미래의 의로운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영적인 속박을 피하고 우리의 자유를 되찾기 위한 노력은 늘 쉬운 과정은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연단하는 자의 불을 지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죄와 위대한 회개의 은사로 인해,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사야 1:18)입니다.

구주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1~32) 우리가 참되다고 알고 있는 원리들을 생활에 적용합시다. 속박에 굴복하기보다는, 의로운 선택을 하고 “[구주의] 말[씀]에 거”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에이치 로스 워크맨 장로, 죄의 사슬을 끊음 리아호나 2006년 7월호, 3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