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3월 “평화를 찾음” (토마스 에스 몬슨)]

평화를 찾음
Finding Peace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
   
제일회장단 제1보좌

  (토마스 에스 몬슨, 평화를 찾음 리아호나 20043월호, 3-7)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추구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왜 폭력이 세상에 난무하는지, 살인과 분별없는 살해 사건들이 왜 신문 지면을 가득 채우는지, 왜 가족의 다툼과 불화가 가정의 신성함을 해치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평정을 잃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평화에 이르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우리는 멈추어 서서 평강의 왕의 가르침을 명상하고 숙고해 볼 필요가 있으며, 그 가르침을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적용하고, 좀더 높은 법에 따라 살며, 더 차원 높은 길을 걷고, 더 나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필요가 있음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평화의 적

아프리카의 기아가 몰고 온 황폐, 중동에 감도는 증오와 잔인성, 그리고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민족 분규는 노력과 굳은 결심 없이는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가 결코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분쟁은 쉽게 정복되지 않는 적들입니다.

이 적들은 반드시 파멸 속에 슬픔의 눈물과 분쟁의 고통과 산산이 깨어진 희망을 자취로 남깁니다. 그들이 미치는 영향은 전쟁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종종 가정과 개인의 마음에까지 이릅니다. 머지않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권고를 잊어버리고 뒤늦게서야 그 권고를 기억할 것입니다. “다툼이 너희 가운데 있지 않게 하며 …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서로 다투는 정신을 가진 자는 내게 속한 자가 아니요, 악마에게 속한 자니 악마가 분쟁의 아비가 됨이라. 저가 사람의 마음을 책동하여 서로 성내게 하며 다투게 하는도다.

“보라 사람의 마음을 책동하고 분노를 돋구어 서로서로 다투게 함은 나의 가르침이 아니요, 이러한 일을 금하게 함이 나의 가르침이라.1

시계 바늘을 되돌려 약 65년 전으로 돌아가면 독일 남부 도시인 뮌헨의 바바리안 시에서 열린 평화 회담이 떠오릅니다. 유럽 강대국의 지도자들이 세계 대전 직전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공개적으로 언급된 회담의 목적은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신과 음모와 권력의 추구 때문에 회담은 결렬될 운명에 놓였고, 그 결과는“그 시대의 평화”가 아니라 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전쟁과 파괴였습니다. 앞서의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의 사무치게 절절한 호소는 전적으로 무시되거나 외면되었습니다. 그는 친구와 적을 하나로 여기고 수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플랜더즈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
줄줄이 서있는 십자가들 사이에.
우리가 누운 곳 알려주기 위함일세.
하늘에는 종달새 힘차게 노래하며 날아오르건만
저 밑에 요란한 총소리 있어 그 노래 잘 들리지 않네.

우리는 이제 운명을 달리한 자들.
며칠 전만 해도 새벽을 느꼈고 석양을 바라보았네.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받기도 하였건만
지금 우리는 플랜더즈 들판에 이렇게 누워 있다네.

원수들과 우리들의 싸움 포기하려고
힘이 빠져가는 이 손으로 그대 향해 내미는 이 횃불
그대 붙잡고 높이 들게나.
우리와의 신의를 그대 저버린다면
우리는 영영 잠들지 못하리,
플랜더즈 들판에2 양귀비꽃 핀다 하여도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해야만 합니까? 유명한 정치가였던 윌리엄 글래드스톤은 “우리는 사랑의 힘이 힘의 사랑을 대신하게 될 날을 학수 고대합니다. 그때 세계는 비로소 평화의 축복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는 평화의 공식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

고상한 목표이겠지만 세계 평화는 개개인이 얻고자 하는 개인적인 평화의 결과입니다. 저는 인간이 추구하는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가정 안에서의 평화와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의 평화와 우리의 삶에서의 평화를 말합니다. 인간의 방식에 따른 평화는 사라지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른 평화만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분노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분노는 아무것도 세우지 못하고 그저 모든 것을 파괴할 뿐이다.3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분쟁의 결과는 너무 황폐하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의 길을 추구할 때 우리의 성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방법을 갈망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만유의 축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에는 선행 조건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생각을 고무시키고 발길을 인도해 줄 세 가지 방법을 제안하겠습니다.

1. 자기 성찰을 합시다.
2.
밖으로 도움의 손길을 뻗읍시다.
3.
하늘을 바라봅시다.

첫째, 자기 성찰을 합시다. 자기 평가는 언제나 힘든 과정입니다. 우리는 교정을 요하는 부분을 그럴싸하게 얼버무리거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장점에 언제까지나 안주하려는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1899~1994) 대관장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평화의 값은 의로움입니다. 사람들이, 그리고 나라마다 큰소리로‘평화, 평화’를 외치지만, 개개인의 영혼에 평화가 싹터 자라게 하는 데 바탕이 되는 개인의 순결, 고결한 성품 등의 원리를 키우지 않으면 평화란 올 수 없습니다. 평화는 강요될 수 없습니다. 평화는 인간의 삶과 마음에서 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4

십이사도 정원회의 리차드 엘 에반스(1906~1971) 장로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내부의 평화, 명철을 초월하는 평화를 찾기 위해서 인간은 정직하게 살아야 하며 서로를 존중해야 하며 책임을 중시하고 기꺼이 일하며 사랑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끼며 인내심과 덕과 신앙과 관용을 가지며, 인생이란 배우고 봉사하고 회개하고 발전하기 위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와 배려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는 방법인 회개와 발전의 축복된 원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5

이 점에 있어서의 개인적인 책임을 검토해 볼 때 가정과 가족 안에서의 부모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최근에 저명 인사들이, 유독 젊은 사람들의 삶에서 폭력이 늘어나는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협의한 사항 중 일부 견해는 우리가 우리의 우선 순위를 살펴볼 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생생한 폭력을 오락으로 보는 사회는 분별없는 폭력으로 가장 영리한 젊은이들의 꿈이 산산 조각나더라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실직과 절망은 자포 자기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존엄성과 정직과 성실성이 복수나 분노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받아 왔다면, 그리고 존경과 친절이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더 나은 기회를 준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더이상 자포 자기하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폭력 방지 회담을 가진 여성들은 파괴 행위와 참혹한 고통으로 끊임없이 추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을 찾게 되었습니다. 정통적인 가족의 가치관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6

실제로 우리의 자녀들이 단순히 우리에게 더 많은 시간을 내주기를 호소하고 있을 때, 우리는 자녀들이 더 많은 물질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잘못 해석할 때가 있습니다. 부의 축적, 즉 재산의 증식은 주님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7

어느 날 저녁 저는 한 무리의 부모와 자녀들이 “미녀와 야수”를 보기 위해 솔트레이크시티의 한 교차로를 건너 큰 공연장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차를 길모퉁이에 세우고 즐거워하는 무리를 보았습니다. 자녀의 성화에 못 이겨 따라 나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아버지들은 소중한 자녀들의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행동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에 대한 무언의 설교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우선 순위대로 시간을 재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주께서 가르치신 방법을 좇아 우리가 자신을 발전시킬 때 진실로 평화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나의 집에 사랑이 차고 넘치면 모든 것 아름답고”8라는 익숙한 노래의 간단한 가사 속에 숨어 있는 깊은 영성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밖으로 도움의 손길을 뻗읍시다. 비록 승영은 개인적인 문제이며, 단체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게 틀림없다 할지라도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교회 회원이 되면 봉사하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권유 받습니다. 책임을 수행하는 직책이 중요한 것으로 인정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보상이 크지 않을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받아들이시는 봉사는 기꺼이 하고자 하는 마음과 준비된 손과 지극한 정성으로 하는 봉사입니다.

때로는 절망이 우리의 앞길을 어둡게 할 수도 있습니다. 좌절감이 계속 우리를 뒤따를 수도 있습니다. 사탄은 간교함으로 우리 귀에“너는 세상을 구할 수 없어. 너의 그 작은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야.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보살필 시간이 어디 있어.”라고 속삭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면서 그러한 거짓으로부터 우리의 머리를 돌립시다. 그래서 우리의 발이 봉사의 길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데 전념하게 합시다. 해결의 빛이 희미해지고 마음이 약해질 때, 우리는 주님의 약속에서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선을 행함에 지치지 말라. 작은 일에서 큰 일이 생겨나느니라. 보라, 주는 진심을 구하시며 기꺼이 하고자 하는 마음을 요구하시느니라.9

한 해 동안, 초등회는 어린아이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보다 잘 알게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 일로 어린아이들이 자주 성전 부지를 방문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자유로운 소년들의 기쁨과 넘쳐 흐르는 힘은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사가 어린아이들을 솔트레이크 성전의 거대한 문으로 이끌고 어린아이들이 손을 내밀어 성전을 만져 볼 때 저는 주님이 어린아이들을 환영하며 위로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0

 

셋째, 하늘을 바라봅시다. 우리가 하늘을 향할 때, 영적인 힘에 이르는 길 곧 평화를 얻는 수단인 기도를 통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하는 데서 우리는 위안과 만족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따라야 할 길을 몸소 보여 주신 개척자되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평강의 왕을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신성한 계획은 죄의 바벨론과 자기 만족과 잘못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모범은 방향을 제시합니다. 주님은 유혹에 직면했을 때 유혹을 피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주님은 생명이 요구되었을 때 기꺼이 주셨습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11 이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 곧 평화를 분명히 선포한 것입니다.

종종 죽음은 예기치 않게 침입자로서 오게 됩니다. 죽음은 삶의 빛과 기쁨을 꺼 버리며 삶의 즐거움 가운데 갑자기 나타나는 적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묵직한 손을 얹고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놀라게 한 채 떠나가 버립니다. 간혹, 극심한 고통과 질병에 시달릴 때에는 죽음이 자비의 천사로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족의 일원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주님이 주는 평화의 약속은 병을 고치는 평안의 유향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2“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3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이 부활의 실재를 알고 가족은 영원하다는 확고한 지식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그러한 사람 가운데 설리반 발로우 소령이 있었습니다. 설리반 발로우 소령은 남북 전쟁 당시, 자신이 불런 전투에서 죽기 바로 일주일 전에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편지를 썼습니다.

1861 7 14
“워싱턴 캠프 클락 기지에서
“나의 사랑하는 사라에게

“며칠 후, 어쩌면 내일 이동하게 될 것 같소. 어쩌면 내가 다시 편지할 수 없을지 몰라, 몇 자 적어야 겠다는 생각이 드오.

“나는 내가 참여하고 있는 대업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확신을 갖고 있으며 나의 용기는 꺾이지 않고 있소. 나는 … 이 정부를 지키기 위해 생의 모든 즐거움을 뒤로 하고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소.

“사라,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끊을 수 있는 줄로 나를 묶고 있는 것 같소. 그러나 국가에 대한 나의 사랑은 강한 바람처럼 나에게 몰려와 전쟁터에서 빠져 나갈 수 없게 나를 묶고 있소.

“내가 당신과 함께 보냈던 축복 받은 순간들이 떠올라 내가 이 기억들을 이렇게 오래도록 향유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과 당신에게 크게 감사함을 느끼오. 나로서는 이 기억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면 우리가 함께 살고 사랑하고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 훌륭한 성인이 되는 것을 지켜볼 수도 있을 미래의 희망을 재 속에 묻는다는 것이 무척이나 힘드오. 그러나 무언가가 나에게 속삭이오. 어쩌면 이것은 내가 해를 입지 않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오게 해 달라는 나의 귀여운 에드가의 기도일지 모르오.

나의 사랑하는 사라, 만약 내가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잊지 말아 주오. 전쟁터에서 나의 마지막 숨이 내게서 떠나게 될 때 그 숨소리는 당신의 이름을 속삭이는 것이 될 게요. 내가 당신에게 한 잘못과 당신에게 준 많은 고통들을 용서해 주오. 내가 얼마나 자주 무분별하고 어리석었는지. 당신의 행복을 망쳤던 모든 작은 얼룩을 나의 눈물로 씻어 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기쁠지 모르겠소.

“그러나 오 사라! 만약 죽은 자들이 이 지상에 돌아와 사랑하는 사람들 주변에 머물 수만 있다면 나는 늘 당신 옆에 있겠소. 가장 기쁜 날에도 가장 어둔 밤에도 … 항상, 항상 당신 곁에 있겠소. 당신의 뺨에 부드러운 미풍이 느껴지면 그건 나의 입김일 게요. 시원한 바람이 당신의 욱신거리는 관자놀이에 불어 오면 그건 나의 영이 지나가는 때문일 게요. 사라, 내가 죽었다고 슬퍼 마오. 내가 먼저 가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오. 왜냐하면 우리는 틀림없이 다시 만날 테니 말이오.14

 

우리의 평화의 메시지

죽음의 암흑은 계시로 밝혀진 진리의 빛으로 쫓아낼 수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5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보살피기 위해 무덤에 왔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전한 천사의 말을 주님의 말씀에 덧붙입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16

그것이 우리의 메시지입니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참으로 모든 사람은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무덤이 노르만디의 십자가로 표시되어 있든지, 봄이 되면 양귀비꽃이 휘날리는 플랜더즈 들판의 성스러운 휴식처에 있든지, 그들에게 평화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바다 깊숙한 곳을 포함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역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 기쁨 주는 이 말씀, 내 구주 살아 계시다!17 .

(토마스 에스 몬슨, 평화를 찾음 리아호나 2004 3월호, 3-7)

1. 니파이삼서 11:28~30.
2. John McCrae,
In Flanders Fields, The Best Loved Poems of the American People, Hazel Felleman(1936), 429.
3. L. Douglas Wilder,
Early Hardships Shaped Candidates”에서 인용, Deseret News, 1991년 12월 1일, A2.
4.
Purposeful Living, Listen, A Journal of Better Living, 1955 1~3, 19.
5. Conference Report, 1959
10, 128.
6.
Family Values in a Violent Society, Deseret News, 1994년 1월 16일, A12.
7.
마태복음 6:19~21.
8.
“나의 집에 사랑이 차고 넘치면”, 찬송가174.
9.
교리와 성약 64:33~34.
10.
마가복음 10:14.
11.
이사야 61:1; 또한 누가복음 4:17~20 참조.
12.
요한복음 14:27.
13.
요한복음 14:2~3.
14. Geoffrey C. Ward, The Civil War(1990), 82~83
에서 인용.
15.
요한복음 11:25~26.
16.
누가복음 24:5~6.
17.
“내 구주 살아 계시다”, 찬송가 68.

 

가정 복음 교사를 위한 제언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후에, 여러분이 가르치는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방법을 사용하여 메시지를 나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현재 세상에서 일어나는 분쟁에 관한 주요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여 주고 가족에게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었는지 묻는다.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화를 찾고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구세주께서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한다.

2. 가족 중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학교에서 누군가 불친절하게 대하거나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도움이 필요한 적이 있었는지 묻는다. 가족들에게 구세주께서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하도록 부탁한다.

3. 여러분이 가르치는 사람 중에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있는가? 구세주의 부활과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여러분의 간증을 하거나, 혹은 적절할 경우,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가족들과 간증을 나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