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4월 “영광의 관을 받고자” (제임즈 이 파우스트)]

영광의 관을 받고자
To Receive a Crown of Glory

  제임즈 이 파우스트 회장
   제일회장단 제2보좌

 (제임즈 이 파우스트, 영광의 관을 받고자 리아호나 2004 4월호, 3-7)

 우리는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며 가시 덤불이나 찔레가시, 파편이나 가시관처럼 우리를 힘겹게 하는 어려움들을 만나게 됩니다. 구세주께서도 가시관을 쓰시고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인생에는 또한 절정의 미와 향기를 지닌 영광의 관이 있습니다.

이생에서 온갖 고통을 주는 수많은 역경과 맞서도록 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가 좀더 잘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리하이는 그 이유중 한 가지를 우리가 세상의 선과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음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1 아담은 땅이 우리를 위해 가시 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2

또한 필멸의 삶은 우리가 시험 받고 스스로를 입증할 수 있도록 세속적 유혹인 가시 덤불과 죄의 날카로운 파편들로“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영원한 진보를 위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 내 육체에 가시를 주셨으니”3

우리 자신의 죄나 이기심이나 연약함을 부인하는 것은 개인 성장의 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막는 가시관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한다면,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회개가 없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즉시 죄의 날카로운 파편과 육욕적인 유혹의 가시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주님이 우리의 영혼을 치유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구세주께서는 “회개하여 개심하고, 내가 너희를 고쳐 주게 하지 아니하려느냐?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미워하고, 악의적으로 이용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 필수적인 한 걸음을 더 걷지 못해,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곪게 하는 가시를 빼내지 못합니다. 아내나 남편, 자녀, 동료에게서 보게 되는 약점과 연약함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5

인생의 길을 아무리 조심해서 걷는다고 해도, 가시 덤불이나 찔레가시나 파편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렸을 때 여름 방학이 되면 우리는 농장으로 가서 맨발로 놀았습니다. 처음 한두 주 동안은 발이 연약하여 가장 매끈한 자갈이나 나무 막대기조차 밟으면 아팠습니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면, 발바닥이 단단해져 다른 어떤 잡초보다도 많아 보이는 엉겅퀴 외에는 길에 있는 무엇을 밟고 다녀도 괜찮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가시관을 쓰셨던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감에 따라, 우리의 영혼은 어려움을 견디는 데 있어 좀더 강해지고, 결심이 확고해지며, 의지가 굳건해지고, 자제력이 늘어나 이 세상의 악으로부터 보호됩니다. 그러한 악들은 어느 곳에나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세상의 유혹이라는 엉겅퀴가 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어렸을 때 우리는 엉겅퀴 씨앗이 공중에 나는 것을 보고자 엉겅퀴의 관모대를 흔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행동이 우리 집과 이웃 집 정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유혹을 가까이하며 장난하고 놀지만, 나중에서야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에게 불행의 씨앗을 뿌렸으며 이웃의 행복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게 됩니다.

양심의 방어

선과 악을 분별하는 방어 장치가 있습니다. 바로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상처에 대한 몸의 자연적 반응이 통증인 것처럼, 양심은 죄의 고통에 대한 영의 자연적 반응입니다. 양심은 사용할수록 강화됩니다.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6 민감한 양심은 건강한 영의 표시입니다.

인생의 가시와 파편들은 어떻게 제거됩니까? 우리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가시를 뽑아 내는 힘은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됩니다. 모로나이는 우리가 경건하지 아니한 모든 것을 부인한다면, 그리스도의 자비하심이 우리에게 충만할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7

너무도 흔히 우리는 고통을 야기시킨 가시를 뽑아내기보다는 죄를 감쌀 붕대를 찾습니다. 가시를 뽑아 내면 상처가 곪아 생기는 오랜 고통을 피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순간의 고통에 얼마나 저항합니까! 살에 박힌 가시나 찔레가시나 나무 파편들을 뽑아 내지 않는다면, 상처가 곪아 낫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수년 전에 우리 가족 중 한 명이 벤이라는 멋진 개 한 마리를 키웠습니다. 어느 아름다운 가을날에 우리는 야외에서 한가로이 거닐었습니다. 벤은 우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땅 냄새도 맡고, 꼬리도 흔들며, 무척 즐거워 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벤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주인에게로 와서, 고통에 가득한 눈빛으로 주인을 바라보며 앞발을 내밀었습니다. 벤의 두 발가락 사이에는 가시가 꽂혀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가시를 빼내자, 벤은 더 이상 절룩거리거나 고통스러워 하지 않고 힘차게 달려 나갔습니다. 저는 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시를 뽑아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 누구한테 가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또한 고통을 주는 죄의 가시를 없앨 길을 본능적으로 찾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구원을 위해 언제나 주님을 찾지는 않으며,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님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구세주의 선물

예수님에게 가해진 채찍에는 가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8

이 잔혹한 행위는 그분의 머리 위에 황제의 월계관을 씌우는 것을 흉내낸 비뚤어진 시도였다고 봅니다. 주님은 가시 면류관의 고통을 당신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위대한 은사의 일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실 때, 가시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나타내던 것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참으로 통렬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적절히 표현했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왕관이지만
가장 고귀한 머리
홀로 그 고독 간절히 갈망하셨네.
거룩해진 그 가시의 상흔9

우리 구세주께서는“육신을 가지고”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그분이 알지 못하는 연약함이란 없습니다. 속죄의 고난으로 인해 그분은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가시와 파편과 엉겅퀴를 알게 되셨습니다.

“그가 세상에 나가 고통과 고난을 겪으며 온갖 시험을 당하시리니, 그가 이렇게 하심은 인간의 질병과 고통을 대신하리라는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라.

“또한 그는 그의 백성을 얽어 맨 죽음의 사슬을 푸시려 죽음을 당하실 것이요, 육신을 입은 인간의 연약함을 취하시어 자비로 가득 차게 하시리니, 육신을 입은 인간들의 연약함을 육신을 가지고 구해 내는 길을 아시려 함이었느니라.10

육체와 영혼에 염증을 일으키는 모든 자극물들은 곪기 전에 뽑아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이미 궤양이 되어 심한 고통을 주고 있다 해도, 우리는 그것들을 뽑아 내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교만이라는 가시, 이기심이라는 엉겅퀴, 자아라는 파편들, 욕망이라는 가시 덤불을 제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병이 낫고 나면, 고통도 사라질 것입니다. 이 과정은 회개로 알려져 있습니다. 회개와 용서는 속죄의 가장 위대한 열매 가운데 속합니다.

브라질의 대도시인 상파울루 외곽에 있는 로즈란디아에는 아름다운 장미꽃 산지가 넓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장미 밭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서면, 향기에 흠뻑 취하게 되고 그 아름다움에 마음이 상쾌해집니다. 장미 가시들이 숨겨져 있건만, 장미를 바라보고 그 향기에 취하는 즐거움은 전혀 방해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인생에서 만나는 온갖 가시와 파편과 엉겅퀴를 올바른 시각으로 제대로 볼 것을 촉구합니다. 그것들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 인생의 가시가 아닌 꽃에 집중하십시오. 우리는 장미와 선인장 꽃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만끽해야 합니다.

인생이라는 꽃의 달콤한 향기를 음미하려면, 우리는 경전 공부와 기도, 올바른 우선 순위와 태도가 생활 속에 자리잡은 의롭고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교회 회원들에게는 그 초점이 성전 안에서 명확해집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 가시를 만나게 되지만, 그러한 가시는 꽃의 달콤한 향기와 뛰어난 아름다움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구세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11

주님을 따름

영국 작가인 토마스 카알라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고귀한 왕관은 지상에선 가시관이며, 영원히 그럴 것이다.12

고대 라틴어 구절인 sic transit gloria mundi는“이와 같이 이 세상의 영광이 사라졌도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적인 보상은 쓰라린 유혹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충실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은“존귀와 영광과 불사 불멸과 영생의 관을 쓰게”13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명예나 시련도 충실한 자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바울은 썩지 아니할 승리자의 관에 대해 말했고,14 야고보는“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충실한 사람에 대해 말했습니다.15

권력이나 재물에 대한 사랑, 물질적인 것에 대한 탐닉, 사람들의 존경 등은 주는 것보다는 획득하거나 받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이런 것들을 가시관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기심은 우리가 고귀한 왕관이라 생각하는 것을 우리 힘으로는 견딜 수 없는 가시관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에게 이같은 부름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 구세주께서 권고하셨듯이 바로 지금이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이기적인 작은 세계, 즉 내 것만 챙기기에 빠져 들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내버리고 다스려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17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구세주를 따른다는 것은 언제나 봉사에 대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대학에 다닐 때, 저는 몹시 가난했습니다. 저는 시간당 25센트를 벌기 위해 통조림 공장에서 뜨거운 통조림을 받는 일을 오랜 시간 동안 했습니다. 저는 그때 이기심이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보다는 가진 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이기적이고 부자가 관대할 수도 있지만, 오직 갖는 것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저는 특권에는 책임, 즉 봉사하고, 베풀고, 축복할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특권이라도 그분의 전능하신 뜻에 맞게 사용되지 않을 경우 거두어 가실 수 있습니다. 충실함과 헌신으로 베풀고, 봉사하고, 축복하라는 과제를 충족시키는 것은 초대 사도들이 말한 영광의 관을 누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것이 삶에 참된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존경이나 경멸을 똑같이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의 말씀을 인용하며 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18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기도와 신앙, 구원의 성약, 가족의 사랑, 형제애와 같이 변함 없는 것에 한결같이 충실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삶에서 죄의 파편들과 세상적인 유혹의 가시를 뽑아 내고 스스로를 부인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메고 구세주를 따름으로써, 우리는 가시 면류관을 영광의 관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특별한 증인이라 불리는 주님의 겸손한 종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저는 그분이 살아 계심을 간증합니다. 제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사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우리가 충실하다면, 존귀와 영광과 영생의 관을 쓰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

(제임즈 이 파우스트, 영광의 관을 받고자 리아호나 2004 4월호, 3-7)

1. 니파이이서 2:8~13 참조.
2.
창세기 3:17~18 참조.
3.
고린도후서 12:7.
4.
니파이삼서 9:13.
5.
누가복음 18:13.
6.
히브리서 5:14.
7.
모로나이서 10:32 참조.
8.
마태복음 27:27~30.
9.
One crown that no one seeks, The Complete Poems of Emily Dickinson, ed. Thomas H. Johnson(1960), 703~704.
10.
앨마서 7:11~12.
11.
마태복음 7:16.
12. Past and Present(1912), 173
.
13.
교리와 성약 75:5.
14.
고린도전서 9:25 참조.
15.
야고보서 1:12.
16.
마태복음 16:24.
17.
디모데후서 2:21.
18.
에스겔 2:6.

 

가정 복음 교사를 위한 제언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후에, 여러분이 가르치는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격려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이 메시지를 함께 전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강아지 벤의 이야기를 읽는다. 가족에게 주님께 뽑아 주시도록 간청할 필요가 있는 가시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지 조용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2. 네 번째 문단을 읽는다. 가족에게 자비를 구하기 전에 용서해 주어야 할 사람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3. 끝에서 두 번째 문단을 읽는다. 가족에게 하나님의 왕국에서 이미 봉사하고자 결심했던 몇 가지 방법들을 열거하게 한다. 그러한 결심들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가?

4. 마지막 문단을 읽는다. 가족에게 어떻게 가시관을 영광의 관으로 바꿀 수 있는지 묻는다. 구세주께서는 자신의 가시관을 어떻게 영광의 관으로 바꾸셨는가?